(제 43 회)

제 6 장  《보감》

2

 

한차례 도락이 끝나자 어느새 수미는 희멀쑥한 육체를 드러내고 쌕쌕거리며 꿈나라를 헤매고있었다.

이제는 부끄러움이란건 다 잊었는지 자기의 알몸을 허모가 샅샅이 훔쳐보는줄 모르고 자기의 팔을 베고 꿈속에서 헤매는 수미의 모습을 보며 그는 설유에 대해 생각하고있었다.

허준이 류배간지도 닷새가 지났다.

아직 수미는 그 내막을 모르고있었다. 먼저번의 일이 있은 후 안개속의 미지의 인물같은 수미에게 일종의 긴장감을 품었던 허모이라 비록 수미를 때없이 품안에 안고 재미를 본다지만 그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가셔진것은 아니였다.

그래서인지 허준이와의 일을 터놓고싶지 않은 허모이다.

설사 수미가 자기에게 관능적인 녀색의 쾌락을 준다지만 허모에게는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설유와 같은 녀인을 정복하고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있었다.

세월이 흘러 설유의 나이도 어지간하겠지만 꿈속에서도 그 부드럽고 청신한 설유가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이제 와서 설유를 정복한다는것은 달보고 짖는 삽살개보다 더 우둔한 짓이였다.

허준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가 하는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따라나설 설유의 정조와 절개를 꺾는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것을 허모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남은것은 오직 하나뿐이였다. 설유가 괴로와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제눈으로 보는것이였다.

허준이 귀양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설유는 큰 타격을 받을것이고 가슴이 터져나오는 아픔을 겪을것이다.

그 고통을 배가로 더해주고 그 괴로움을 한껏 더해주어 설유가 살아 숨쉬는것이 죽는것보다 더 참혹한 고달픔이라는것을 알게 하고싶은것이 허모의 심보였다.

게다가 자기는 무슨 도깨비가 붙었는지 일점혈육 하나 없지만 설유는 저같이 보름달같은 딸을 데리고 지금은 희멀쑥하게 잘 생긴 손자까지 데리고 깨쏟아지게 살고있다.

다음날 어슬녘에 허모는 두명의 심복부하를 꽁무니에 달고 허준의 집으로 향했다.

《부인을 불러내라!》

허모가 령을 내리자 심복부하 하나가 대문을 쾅쾅 두드렸다. 댁의 하녀가 문을 열고 빠금히 머리를 내밀었다.

《허모감찰나리가 찾아오셨다! 어서 안주인에게 알려라!》

설유가 나오더니 허모를 알아보고 어리둥절해하였다. 허모는 깍듯이 례의를 표하였다.

《제수, 오래간만이요. 그새 이 시형을 잊지 않았소?》

한성에 와서 처음으로 허모를 보는 설유였다. 제법 례를 차리며 제수라고 괴여올리는 허모의 바싹 여윈 상판을 얼핏 바라보며 설유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쌀쌀하게 물었다.

《어찌 우리 집에 행차하셨나이까?》

《허,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반갑지 않은게로구만. 시형을 맞는 제수의 말투가 곱지 않다-》

그 말에 아랑곳없이 설유의 말소리에는 한본새로 서리가 돋쳤다.

《집주인도 없으니 후날에 다시 오시지요.》

대문을 닫으며 돌아서는 설유를 제지하며 허모가 손을 내저었다.

《내 주인의 소식을 알려주자고 왔소.》

그 말에 설유는 주춤거렸다.

이즈음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였다. 헌데 주인의 소식을 가져오다니?

며칠째나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이였지만 그전에도 임금님의 치료를 하느라고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 종종 있었던지라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던 설유였다.

허나 이쯤 되면 남편에게서 기별이 있겠는데 이번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기별이 없어서 의아한 생각도 없지 않았던 설유였다. 그러나 허준이 이제 당장 집필하게 될 《잡병편》 전반에 대한 자료들을 분류정리하고 《잡병편》 5권에 대한 후열과 추고, 교정을 하느라고 무척 분망한 나날을 보냈던지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설유의 기색을 살피며 허모가 히물거렸다.

《그래 어의님의 소식을 알고싶지 않소?》

그 말투에는 어딘가 야유가 비꼈다. 설유는 미투리로 물을 떠마신것처럼 기분이 잡쳤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오시오이다.》

허모가 심복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내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느릿느릿 팔자걸음으로 토방우에 올라서 방안으로 들어온 허모는 마치 제집에라도 들어선듯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설유, 그새 잘 있었나?》

그 누구도 없는 호젓한 방안에서 단 둘이서 대면하게 되자 서슴없이 자기의 탈을 벗어던진 허모의 방자한 태도를 날카롭게 주시하며 설유는 오똑하니 방안에 서있었다.

《왜 그렇게 서있나? 어서 앉으라구! 주인이 그렇게 서있으면 내가 옹색해서 마음놓고 앉을수 있나?》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설유는 되알지게 내쏘았다.

《주인의 소식이란게 대체 무엇이오이까?》

허모는 능글거리며 설유의 몸을 우아래로 걸탐스레 훑어보았다.

세월과 더불어 눈가에 잔주름이 간간이 보였으나 여전히 청신한 설유였다.

마치 심산속에 고요히 핀 도라지꽃마냥 녀성의 순정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탈색없이 지니고있는 설유를 허준이 없는 빈방에서 이렇게 단둘이 마주서고보니 이전날보다 더 불타오르는 욕정이 가슴에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허모가 잃어버렸던 물건을 확인하듯이 자기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느낌에 설유는 심한 모욕감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양이 허모의 마음을 더 달아오르게 하였다.

(내 이제 네년을 묵사발 만들고말테다. 허준이놈이 내가 네년을 이 궁둥이밑에 깔구앉은걸 알면 아마 복통이 터져 나자빠질게다. 오늘은 내 손에 영낙없이 잡혔지. 으하하!)

무엇이라 표현할길 없는 쾌감과 짜릿한 흥분이 전신을 휩쓸며 허모는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 서방님의 소식을 알고있나?》

《우리 주인이 어떻게 되였소이까?》

《허- 이 집은 완전히 그믐밤이구만. 내인이라는게 집안에 붙박혀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형편엔 영 깜깜이구만. 그것도 모르구 하루종일 뭘 하나. 지금 온 한성바닥에 소문이 짜한데.》

《네?》

설유의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세차게 쿵쿵거렸다.

허모가 나타난 첫 순간부터 우엉씨처럼 지꿎게 달라붙었던 불안감이 물목을 터뜨렸다.

설유는 한걸음 다가서며 성급하게 물었다.

《우리 예영이 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되였단 말씀이오이까?》

참새를 실컷 포식하고 피발린 낯짝을 입가심하며 하품을 해대는 고양이마냥 허모는 승자연한 말투로 느릿느릿 내뱉았다.

《음- 자네의 그 유명짜한 어의나리가 지금 정배지에 가있네. 오늘까지 닷새쯤 되는지…》

《뭐라구요?!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되셨…》

설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더니 스르르 그자리에 무너졌다.

바로 이것이 일일천추 허모가 보고싶어했던 모습이였다. 그 가느스름한 눈에 깨고소해하는 빛이 완연했다. 이때라고 생각하고 허모는 은은한 살기를 풍기며 뇌까렸다.

《뭐 그다지 상심할게 있나. 설유, 이게 바로 너네들에게 차례진 숙명이야!》

얼굴을 싸쥐고 무릎에 묻고있던 설유가 머리를 쳐들고 일어섰다.

《?…》

《왜? 그렇게 쏘아보면 어쩔텐가? 응, 어쩔테야? 이 지체높은 량반출신인 허모가 너를 끔찍이도 위했건만 넌 나의 그 진정에 등을 돌려대고 그 천한 서얼놈에게 몸을 맡겼지? 그래, 내가 그 허준이놈보다 뭐가 못해? 뭐가 못한가 말이야?! 난 네놈들때문에 신셀 망쳤어. 지금쯤은 당상관이 되고 대감으로 등용되였을 내가 너의 그 알량한 허준이놈때문에 요모양, 요꼴이 되였어!》

입에 거품을 물고 줴치는 허모의 히스테리적인 모습에 설유는 그가 허준이를 모해하지 않았을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분명 허모의 작간이라는 판단이 이 시각 확연해지면서 분노가 가슴에 치밀어올랐다.

《우리 남편을 뒤에서 모해한건 당신이지요?》

설유의 반문에 허모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의 실눈에 흡사 먹이를 노리는 독사의 살기가 뻗쳤다. 자기 가슴팍을 두드려대며 고함질렀다.

《그래, 나다! 어쩔테냐? 내 네놈들을 복수하려고 십년이라는 긴 세월 모진 악전고투를 다 벌렸다. 허준이놈을 옥에 처넣은것도 나고 네놈들이 쓴다는 의서원고를 훔친것두 바로 나야! 그리구 이번에 그 쓸개빠진 허준이놈을 임금의 사망죄로 몰아붙여 귀양보낸것도 나란 말이다!》

설유의 눈에서 불이 이글거렸다.

《네놈이로구나! 의로운 일에 한생을 바쳐가는 우리 남편을 옥에 처넣구 또 피와 땀이 슴배인 의서원고까지 훔쳐가더니 이젠 뭐 역적으로 모함해서 어디에다 보냈다구? 네놈도 사내냐? 그리구 사람이냐? 아무리 어머니가 다른 형제라 해도 한아버지의 피를 받은 제 동생인데 그렇게 모질고 잔인할수 있느냐? 그래, 네 일이 잘 안되는것이 어찌 우리 애아버지의 탓이구 죄란 말이냐?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을 놓고 그리도 배아파하더니 이젠 아예 목숨까지 앗아가려 하다니, 네놈은 천벌을 받아 제명을 다 못살줄 알아라!》

허모의 눈이 돌에 맞고 뒤로 휘딱 자빠진 개구리의 눈처럼 불거졌다.

《뭐, 뭐?! 다 말했어? 네년이 아직두 속이 살았구나.

아니다, 아니야!

난 이제 굉장한 벼슬에 올라 한평생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릴테다. 네놈들이 아무리 날쳐두 량반우에 올라설수 없어!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를 비명에 죽인것이 바로 허준이 그놈이야!

내 이제 그 허준이놈을 위리안치시키자는 형벌을 건의해서 저 날바다의 섬으로 정배를 보내고말테다. 오늘 이렇게 온게 네년한테 허준이놈소식을 알려주자는것두 있지만 설유, 네년과 셈할게 있어서 왔다! 알겠어? 난 네년의 그 하얀 몸뚱아리를 발가벗기구 네년의 정조가 과연 어떤건지 알고싶어서 왔어! 어서 무릎을 꿇고 빌어라! 순순히 응하면 내 널 생각해서 허준이놈을 류배지에서 풀려나오게 할수 있지. 어때? 이런 조건부면 네 몸뚱아리의 값이 너무 비싸지 않아?》

허모의 상스럽고 음탕하기 그지없는 말에 귀가 멍멍해 무슨 소리인지 설유는 가려들을 겨를이 없었다.

다만 앞에 서있는 허모가 사람이 아니라 먹이에 주린 이리로 안겨오고 너절하고 치졸한 이런자에게 남편이 모해당했다는 원통함과 분노로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나기 시작하였다.

설유가 대척이 없자 허모가 제잡담하며 먹이를 덮치는 승냥이마냥 달려들었다.

《개같은 자식!》

설유의 오른손이 허겁스레 달려드는 허모의 상판에 날아갔다.

귀쌈치는 맵짠 소리에 뒤이어 설유가 재빨리 탁자우에 놓여있는 자그마한 광주리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가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의 목에 대고 소리쳤다.

《이제 한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가차없이 내 목을 찌를테다!》

불의에 귀뺨을 얻어맞고 뗑해있던 허모가 개 벼룩이 씹듯 입술을 악물고 놔까렸다.

《쌍년, 망할년같으니! 내 네년을 그저…》

악이 치받친 허모는 자기앞에 놓인 탁자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탁자가 쿵- 하고 뒤집어지고 그우에 놓여있던 물건들이 좌르륵 방바닥에 흩어졌다.

《좋다, 어디 두고보자. 내 오늘은 그만 물러가마. 허나 허준이한테는 손톱눈만 한 사정도 없을줄 알라! 두고봐라. 네 그 잘난 허준이놈을 어떻게 황천길에 보내나 똑바로 봐라! 그때 가서 울고불고 하지 말라! 죽일년같으니…》

설유에게서 얻어맞은 뺨을 어루만지며 씩씩거리던 허모는 그만에야 발길로 방문을 걷어차고 나갔다.

한손에 쇠가위를 쥐고 가슴을 부여안고 방안에 오도카니 서있던 설유는 허모가 대문밖을 나서고 하녀가 빗장을 지르는 소리를 확인하고는 정신을 잃고 그자리에 맥없이 쓰러졌다.…

달래의 주막집은 제법 흥성거렸다.

기다란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상투를 인 사나이들이 저마끔 권하면서 술을 마시고있고 그사이로 달래가 쟁반을 들고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오고갔다.

박응규가 다급히 마당으로 들어서며 열려진 창으로 손을 저어 달래를 불렀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응규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수건으로 응규의 이마에 돋은 땀을 훔쳐주며 달래가 눈이 동그래서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야단났소! 의원님이 정배살이를 갔소!》

《뭐라구요? 어쩌면…》

달래의 손에서 수건이 스르륵 떨어졌다.

응규가 허리를 굽혀 그 수건을 주으며 놀란 토끼같이 휘둥그래진 달래의 눈치를 살폈다.

《언제 그렇게 되였어요?》

《열흘전에 그렇게 되였다오.》

《열흘? 그런데 당신은 여태까지 그것두 모르구 뭘하고있었어요?》

《조정에서 임금의 사망을 일체 비밀에 붙이다나니 난 전혀 몰랐소. 분위기가 별로 살벌하기에 의금부의 라졸로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임금이 사망하구 어의가 역모죄로 잡혀 귀양갔다고 하더군. 어의라는거야 의원님이 아니겠소. 그래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거짓말을 하구서 겨우 빠져나왔단 말이요.》

《임금이 사망한게 어찌 의원님의 탓이나요? 임금이라구 죽지 않는다는 법이 없지 않나요.》

응규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주위를 살펴본다.

《쉬! 누가 듣겠소. 지금 시가엔 라졸들이 한벌 덮였소. 아무 말이나 망탕 하지 마오!》

달래는 응규에게 눈총을 쏠뿐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생각난듯 응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이렇게 가만 있으면 어떡해요? 빨리 알려야지.》

《누구한테 알린다는거요?》

《누군 누구야, 기동오래비와 칠성이지.》

《아차! 내 정신 봐라! 헌데 저 손님들과 술값은 어떡하구?》

달래가 꽥- 큰소리를 쳤다.

《정신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술값이 뭐라구. 어서 나와 함께 가자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달래는 행주치마를 벗어 손에 쥐고 바람을 일구며 내닫기 시작했다. 박응규가 그뒤를 헐레벌떡 쫓아갔다. 달래의 말을 들은 기동과 칠성은 깜짝 놀랐다. 칠성은 그자리에 털써덕 주저앉으며 억실억실한 두눈을 지릅뜨고 목청을 높였다.

《아니, 정배살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요? 그 량순한 의원님이 무슨 죄가 있어 정배살이를 한단 말이요?》

기동이는 고리눈을 번뜩거렸다.

《응규형님! 대체 어떻게 되여 그렇게 되셨다우? 좀 자상히 말해주시우!》

《나도 방금 들은 소리인데 임금님이 갑자기 붕어하시였는데 아마 그 책임을 어의인 허의원님께 몰아붙인 모양이네.》

《?…》

모두들 너무 억이 막혀 입만 벌리고 말을 못하였다.

명의인 허준을 자신처럼 믿고있는 이들이였다.

허준이 곁에 있으면서도 임금이 세상을 떠났다는것은 불치의 병이 아니면 다른 쪼간이 있어서라는 공통된 인식이 모두의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달래가 울음을 터뜨렸다. 솔직하고 꾸밈을 모르는 달래이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도 다 있담!

그 고지식하고 의술밖에 모르는 의원님이 죄인이라니, 어떤 놈이 우리 의원님을 모함하고 붙잡아갔노? 이 험악한 세상 어디에 그런 훌륭한분이 또 있을라구… 하늘도 무심하지. 나쁜짓을 밥먹듯 하는 놈팽이들은 가만 놔두고 우리 의원님같은 선량한분에게 벌을 주다니. 아이고, 분통해라!-》

달래의 곡성과 넉두리에 다른 때같으면 한마디 퉁을 주었을 칠성이도 두눈을 슴벅이며 눈물을 머금었다. 모두가 침통한 기색으로 멍하니 서있는데 기동이가 팔굽으로 눈물을 씻으며 한마디 하였다.

《자자, 이렇게 운다고 문제가 해결되겠소? 그만 슬퍼하구 우리 선생님을 구원할 방도를 생각해보기요!》

원체 덤비는 기동은 허준이에게서 의술을 배우면서 점차 거칠던 성격이 다듬어졌고 이제와서는 퍽 진중하고 듬직한 사나이로 성장하였다. 기동이 박응규에게 물었다.

《응규형님, 선생님이 정배간 곳이 어디랍디까?》

《그건 아직 나도 잘 모르네. 의금부의 관리들이 저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일체 발설을 안하누만.》

《형님은 빨리 가서 선생님이 어데로 정배살이를 갔는지 그것부터 알아보시우. 소식을 알아가지구 선생님의 댁으로 곧장 오시우다!》

《음, 알겠네.》

응규가 그 즉시 사라졌다. 부리나케 뛰여가는 응규를 바라보던 기동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우린 여기 좀 있다가 어슬녘에 선생님의 댁으로 가보자구. 역모죄로 몰아붙였다니 사람들이 다 보는 대낮에는 갈수 없는거구… 사모님이 이 일을 알고나 계시는지, 혹 자리에 눕지 않으셨는지 걱정되누만.》

모두들 그제야 허준의 소식을 들으면 제일 가슴터질 사람은 설유라는 사실에 마음들이 더 무거워졌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달래가 설유의 말을 꺼내자 다시금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같은 녀성으로서 그들부부간의 자별한 사랑을 부러워하던 달래였다.

저녁녘에 기동과 칠성이, 달래가 설유의 방에 들어서니 설유는 방안에 자리펴고 누워있고 그옆에 예영이가 근심어린 낯색을 짓고 간호하고있었다.

달래가 시샘하던 설유의 아름다운 얼굴은 해쓱하고 창백하였다.

설유의 싸늘한 손을 꼭 잡고 달래는 울먹이는 소리로 말하였다.

《사모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이까?》

설유가 안깐힘을 쓰며 일어나앉았다. 며칠사이에 몸은 눈에 띄울 정도로 축갔으나 두눈만은 가늠할수없이 그윽하였다.

그들을 둘러보며 설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떼였다.

《너무 상심들 말아요. 그인 그렇게 쉽게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예요.》

눈물이 그렁한 칠성이가 설유의 손목을 그러잡고 흔들었다.

《사모님, 의원님께서 겪으실 정상을 생각하오면 가슴이 미여지오이다.》

기동이는 강잉하게 일어선 설유를 바라보며 선생님의 뒤에 이런 설유가 있어 그가 쓰러지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차 박응규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방안에 들어섰다. 달래가 성급하게 물었다.

《그래 좀 알아왔어요?》

《거참, 허탕이요. 헐치 않구만. 의금부의 관리들이 입을 딱 봉하구 모르쇠 하는데 난들 어떡하겠소.》

《에그, 이렇게 못났다구야!

형조에 그렇게 오래 있었다는 사람이 의금부의 라졸들에게 부탁하면 제꺽 알텐데 그것 하나 못 알아봐요? 차라리 나와 치마와 바지를 바꿔입자요!》

달래의 입심에 응규는 그저 입만 헤벌리구 죽었소 하구 아무 대꾸도 못하였다.

그런 남편의 꼴이 민망스러운지 달래가 눈을 흘겼다. 그러더니 괴춤속에서 묵직한 새빨간 주머니를 꺼내 응규앞에 뿌려던졌다.

응규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뭐요?》

《뭐긴 뭐겠어요, 돈이지요. 아마 이것만 찔러주면 무쇠같은 열쇠를 잠근 입을 백개는 열겠수다.》

《아니, 이렇게 많은 돈을?》

《왜, 그 돈이 아깝수?》

말문이 막힌 응규가 얼굴이 시뻘개져가지고 뒤통수만 긁어댔다.

《내가 아까 제정신이 없다나니 미처 생각 못했어요. 공짜라면 구정물두 마시는 관리들인데 빈손으로 찾아갔으니 그런 중대한 일을 대줄수가 있겠나요? 빨리 다시 갔다오라요!》

설유가 그들부처가 노는 양을 바라보더니 조용히 귀띔해주었다.

《지금은 북도에 류배갔는데 얼마 안있어 어디 바다가에 있는 외진 섬에 위리안치시킨다고 하더군요.》

칠성이가 그 말에 우락부락한 제 성격대로 나섰다.

《까짓거, 정배지를 모르면 우리가 찾아보면 될게 아니우. 북도라면 어딜가? 그리고 섬에 정배보낸다면 배를 타고 가면 될게 아니요. 더구나 위리안치시키는 섬은 많지 않을거요.》

기동이가 그 말에 반박하였다.

《이 일은 그렇게 주먹치기식으로 했다가는 더 시간만 끌수 있어. 네말대로 섬이 확실하다 해도 어느 섬인지 모르구 온 바다를 다 훑을수야 없지 않니. 우리 나라야 세면이 바다인데 서해인지 남해인지 그리구 동해인지도 모르구 어데 가서 찾는단 말이냐. 그야말로 소경 파밭 매는거지. 그러니 응규형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선생님의 정배지를 꼭 알아오시우!》

사리정연한 기동의 말에 칠성은 아무 말도 못하고 응규는 알았다는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규형이 소식을 알아올 때까지 우린 빨리 돌아가서 선생님을 찾아갈 준비들을 갖추자. 일단 정배지를 알면 지체말구 떠나야 한다.》

모두들 서두르는데 달래가 나직이 기동을 불렀다.

《오라버님, 난 여기서 사모님과 함께 있겠어요.》

기동이가 놀라며 물었다.

《그럼 주막집일은 어떻게 하나?》

《주막집일은 다 생각이 있어요. 칠성이, 넌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려 며칠동안 영업하지 않는다구 패쪽을 걸어놓구 문이랑 다 관건해, 알아들었지?》

칠성이가 눈을 끔벅거렸다.

《역시 우리 누이가 달라!》

《너 또 까불겠니?》

달래와 칠성이의 싱갱이질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동이네들이 돌아갈 차비를 서두르는 모양을 주시하던 설유가 기동과 칠성이에게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삼촌들이 보관하고있는 의서의 원고는 일없어요?》

《사모님, 그건 조금도 념려하지 마소이다. 우리가 든든히 보관하고있소이다.》

기동이가 확신성있게 대답하였다.

《어련하겠지만 그 의서의 원고는 그이의 목숨과도 같은것이예요.》

달래가 의아해서 간참하였다.

《사모님,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의원님이시온데 의원님을 구원할 방책부터 찾아야지 의서는 무슨 의서오이까?》

설유가 달래의 손에 자기의 손을 얹으며 나직하나 또박또박 그루를 박으며 대답하였다.

《아니예요. 달래, 그이한테는 그 의서가 희망이고 삶이예요. 이제 두고보라요. 그 의서를 다 쓰기 전에는 그인 절대로 쉽게 쓰러지지 않아요. 의서가 없으면 하루도 못 견디지만 의서만 있으면 그인 어떤 최악의 경우에도 살아날거예요. 난 그걸 믿어요. 나자신보다 더 믿어요!》

기동이가 격정에 겨워 설유를 바라보았다.

《사모님, 그 의서원고를 우린 목숨을 내대서라도 잘 보관하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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