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특종기사를 찾아서

19

 

료정에서 홍마담에 대한 취재를 마무리하고나니 날은 벌써 어지간히 어두워있었다. 김현철과 연희는 마담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료정밖을 나섰다. 좁은 골목을 지나 거리에 나서니 김현철은 배가 출출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연희는 대꾸가 없었다. 무언을 동의의 표시로 받아들인 그가 다시 물었다.

《어디로 모실가요?》

연희가 앞을 내다보며 대답했다.

《콩나물국밥을 좋아하세요?》

(갑자기 웬 콩나물국밥이야?)

《여기서 조금 가면 돼죠.》 하며 연희가 앞장에 섰다.

김현철은 주객이 전도되는것 같아 당황해졌지만 따를수밖에 없었다. 십분쯤 걷고나니 연희의 말대로 《민들레동산》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간판이 걸린 식당이 눈에 띄였다. 원래 여기는 사람들이 가까운 술집에서 술을 마신 뒤 맑은 콩나물국밥으로 속풀이를 하기 위해 찾는 곳이였다. 지금은 초저녁때라 아직 드나드는 손님들이 그닥 눈에 띄지 않았다.

연희가 그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혹시 콩나물국밥을 좋아하지 않는것은 아니예요?》

《별로 가리는 음식이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예요.》

《연희씨는 콩나물음식을 특별히 좋아하나 봅니다.》

연희는 지금 이상야릇한 감정에 잠겨드는 자기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왜서인지 그 원인은 찾지 못했다. 남자들이라면, 술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내라면 무작정 싫어했고 곁에 다가들지도 못하게 하였는데 김현철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있는것이 자기로서도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아니, 필요해서 그래. 난 아직도 정확한 대답을 못 찾았어. 이 사내가 왜 지난날의 사건에 그토록 연연하는지… 그때문에 나의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건 아닌지… 바로 그걸 알고싶을뿐이야. 그래서 그의 저녁식사초청도 뿌리치지 못한것이고…)

내심 이렇게 자기를 변명하고있었으나 한때 자기가 제일 원망하던 사람과 거의 온종일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몹시 두근거리게 했다. 작은 가슴속에서 새처럼 푸드득거리는 그 두근거림을 현철이가 느낄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워보려고 저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터놓지 않던 어릴 때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릴 때는 콩나물음식이 참 싫었어요. 어머니가 콩나물음식을 매일이다싶이 해주었거던요. 그때는 밑으로 구멍이 뚫린 양철바께쯔에 싹틔운 콩을 앉히고 나물을 키우군 하였는데 난 바께쯔밑에 고여있는 물에서 나는 콩비린내가 정말 싫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일찌기 병으로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어요. 콩나물에는 숙취를 뽑는 기능이 있다는걸… 그리고 매일같이 술취해 들어오던 아버지에게 콩나물국을 대접해야 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서글픔두요.》

연희는 약간 갈린 음조로 말을 이었다.

《그때에도 우리 아버지는 정말 많은 술을 마셨던것 같아요.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고주망태가 되여오군 하셨는데… 병약한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맞아주고 더럽혀진 옷을 밤새껏 빨아 다림질까지 했어요. 다음날 아침 어머니가 끓여준 콩나물국을 자시면서 아버지는 말하군 했지요. 미안하다고… 그렇게 나간 걸음인데 저녁에는 또 취해서 들어오셨어요. 아마도 이 사회가 술을 권하는가봐요.》

연희는 김현철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얼마전까지만도 아버지와 함께 간이술집의 탁자에 취해 쓰러져있던 그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연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어느 한 식탁으로 연희를 안내했다. 연희는 그런 침묵이 못마땅했다. 왜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걸가. 그리고 그에게서 어떤 말을 기대하는걸가. 연희는 저녁식사를 함께 하자는 그의 청을 초기에 뿌리치지 못한것이 자못 후회되기도 했다. 이제라도 건강을 핑게로 돌아서버릴가 했으나 례의에 어긋나는것 같아 참았다. 김현철은 새침해진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식탁에 앉자마자 툭 내던지듯 말했다.

《난 태여날 때부터 고아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이 어떤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의 말이 연희의 가슴속 작은 못에 돌덩이처럼 던져졌다.

(고아였구나!)

눈앞에 앉아있는 김현철의 어깨가 처져보이는것이 어쩐지 측은해보였다. 그런줄도 모르고 제 혼자 부모의 사랑과 정에 대해 애잡짤한 설음을 토설했으니 그 말을 듣는 그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가.

연희는 그에게 사과하는 의미를 담아 일부러 해죽 웃었다.

《제가 먹을 음식도 함께 청해주세요. 맛있는걸로요.》

김현철은 연희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처녀를 만난것은 서너번뿐인데 왜서인지 오늘은 퍽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것처럼 다정하게 느껴지는것이 이상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그닥 싫지 않았다.

(내가 너무했어. 그렇게 화낼 일이 아니였어. )

그가 속으로 자책하는데 연희가 말을 걸어왔다.

《앞으로도 취재를 계속할 결심이예요?》

《그래야 할것 같습니다. 연희씨 덕분에 하루동안에 많은 성과를 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직업때문인가요?》

《예?!》

《기자라는 직업의식에서 기사를 쓰기 위해 취재하는가 말이예요.》

《그런 리유도 있고 또 다른 리유도 있습니다.》

《직업외에 다른 리유라면… 누군가의 부탁을 받았는가요?》

《부탁은 무슨… 어떤 괘씸한 사람때문에 시작을 했는데… 점점 발을 뽑게 되지 않습니다.》

《그 괘씸한 사람이 혹시 저의 아버지가 아닌가요?》

《선배님이요? 무슨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합니까. 그 괘씸한 사람이 선배님과 가까운 사이이기는 하지만 선배님은 아닙니다.》

김현철은 시무룩이 웃었다. 연희는 새초롬한 얼굴로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 괘씸한 사람이 나예요?) 하는 물음이 입가에서 맴돌았으나 찍어 묻기가 망설여졌다.

(그래, 나의 행동이 이 사람을 그 길로 떠밀어놓은것일수도 있어. )

연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별안간 이 사건에 집착하기 시작한것은 분명 오보기사를 낸 이후부터였다. 연희는 그의 발치에 신문을 내동댕이 치던 자기가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과격한 행동을 하리라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래서 되새기기조차도 부끄러웠다.

김현철의 취재가 자기의 행동과 련관되여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일이 궁금했다. 그 호기심이 그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한 요인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어쩌실 계획이예요? 그 영화제작자란 사람의 가족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가요?》

연희가 물었다. 김현철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그 사람은 애초에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난 탐정이 아니랍니다.》

《그럼 이 선상에서 마무리 지을셈인가요?》

《난 그저 진실을 밝히는 기사를 쓰면 됩니다. 그런데 아직은 선명치가 않습니다. 김춘옥씨의 가족과 그의 친지들은 애매하고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홍콩에서의 김춘옥씨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증언할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반대켠의 사람들을 만나야겠습니다.》

《그게 누구들이예요?》

《김춘옥씨를 고발한 문태석씨와 당시 싱가포르에 나가있던 외교관들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사는지 아나요?》

《품을 좀 들인 덕에 문태석의 주민등록번호와 외교관들중에서 대사의 이름은 알아냈습니다. 리도희라는 분이더군요.》

《리도희?!》

김현철은 문득 이상한 감촉을 느끼며 연희를 마주보았다.

《왜? 아는 사람입니까?》

연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예요. 마침 저기 식사가 나오는군요.》

저녁식사가 끝난 후 김현철은 연희를 집앞까지 바래워주었다. 그는 연희가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주고서야 돌아섰다.

그는 밤새껏 취재한 자료들을 정리하였다. 먼동이 푸름푸름 밝아올무렵에야 피곤에 몰려 깜박 잠에 들었던 그는 요란스러운 전화종소리에 깨여났다.

(새벽부터 누구야?) 하는 짜증을 누르며 수화구를 귀에 가져다 대니 연희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피로해서 그런지 몹시 아린 눈을 비비고난 김현철은 급히 세면을 하고나서 밖으로 나섰다.

약속한 공원의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려서야 연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연회색양복을 입은 늙은이의 팔을 끼고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머리칼이 은실처럼 하얀 백발의 늙은이는 얼굴에 엷은 주름살이 얽혀있었는데 상대의 모습을 찬찬히 재여보는것 같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연희는 반기는 기색을 지었다. 그리고 늙은이에게 소개했다.

《방금전에 말씀드린 김현철기자입니다.》

《반갑소.》

늙은이는 김현철에게 주름잡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례의를 표하는데 연희의 다음 말이 김현철을 놀래웠다.

《이전에 외교통상부에서 일보시던 리도희선생님입니다.》

김현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연희는 어줍게 웃었다.

《미안해요. 저도 좀전에야 이 선생님이 그때 싱가포르에 계셨던걸 확인했어요. … 그럼 제가 마실걸 가져오겠어요.》

연희는 두사람이 대화를 나눌수 있도록 자리를 피했다. 리도희가 그에게 당부했다.

《연희야, 내겐 차를 가져다주렴.》

김현철과 나란히 의자에 앉은 리도희는 연희의 멀어져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늙은이 특유의 나른한 소리로 혼자말처럼 말했다.

《연희의 아버지와 난 젊어서 친구였소. 대학동기였지. 엊저녁 퍽 늦어서인데 저애가 전화를 하더구만. 아침에 날 찾아오겠답디다. 나야 좋지요. 늙은 나에게 아침부터 꽃같은 처녀가 찾아오는게 싫지 않거던… 그런데 찾아와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내놓고 말하지 않는걸 물었소. 1987년에 싱가포르에 나가있지 않았는가고… 그래, 그곳에서 일했었는데 몇달 못 있었지. 그해 봄에 어떤 불쾌한 리유로 하여 아프리카쪽으로 조동이 됐고 거기서 열병을 만나 죽다 살았소. 그런데 연희가 어떻게 알았을가? 그의 아버지가 말했을리는 만무하고, 그래 연희에게 물었더니 어떤 기자가 그 무슨 취재인가를 한다고 하더군.》

김현철이 말을 받았다.

《제가 그해초에 살해된 홍콩교민에 대해 취재를 하던중이랍니다. 혹시 김춘옥이라는 녀인을 아십니까?》

《난 그 녀인을 모르오. 그런데 그의 남편의 이름을 들어보니 만나본 사람이더군. 문태석이라고 했던가.》

《언제부터 알게 되였습니까?》

《그건 그렇고…》

리도희는 그의 물음에 대답을 피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이제는 퍽 오래전의 일인데 왜 갑자기 파고들지요?》

《진실을 밝히고싶어서입니다.》

《무슨 진실을 말이요?》

상대방을 당혹케 하는 질문이였다. 하긴 김현철이 밝히려고 하는 진실은 누구에게는 리익을, 다른 누구에게는 불명예나 불리익을 선사할수도 있었다. 하기에 진실은 바라기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워도 하는것이다. 그러나 김현철은 이 진실은 반드시 파헤쳐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우선 죽은 녀인의 가족과 그의 친지들이 간절히 바라고있었다. 또 그것이야말로 6. 15공동선언을 명실공히 고수하고 리행해나가는 진정한 첫걸음이 될것이라던 최세진의 주장이 그의 가슴을 세차게 뒤흔들고있었다.

김현철은 리도희에게 자기가 취재한 내용들과 그 과정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을 하였다. 리도희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으나 표정만은 덤덤했다.

《이미 오래전에 말이요. 그 사건을 취재하려던 기자가 한명 있었소.》

《알고있습니다.》

리도희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필성선배님이실겁니다.》

《그것까지 알고있소? 그러나 장기자가 당신에게 취재를 해보라고 권한건 아닌것 같은데…》

《그건 제 개인의 결심입니다.》

《개인의 결심이라…》

리도희는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또 물었다.

《장기자도 그 사실을 아는가요?》

《알고있습니다.》

《그럼 장기자가 취재를 중도에서 그만둔 리유도 알고있소?》

《무슨 말씀인지? … 장선배님은 그때 후속기사까지 마무리지은걸로 알고있습니다.》

《허 참, 꼭지가 그렇게 맺어졌는가. 그럼 한가지만 더 묻기요. 이 취재에 연희는 왜 끌어들였소?》

《제가 의도한바는 아니였습니다.》

김현철은 또다시 연희가 취재에 끼여든 사연을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그의 말이 끝나서야 늙은 이전 외교관은 취재에 응하였다.

《좋소. 일단 믿어보겠소. 그러나 조건부가 있소. 이 사건취재에 더이상 연희를 끌어들이지 말라는거요.》

《알았습니다.》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요. 명심하라는거요. 그리고 당신도 이 정도에서 그만했으면 하오. 당신이 존경하는 장기자도 중도에서 멈춰선게 다 리유가 있어서요. 진실?! 비밀로 남아있는 진실이라고 해서 다 밝혀내는것이 무작정 좋은것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요? 그리고 진실이 곧 진리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안할게고… 진리는 만들어지기도 한다오. 중요한건 가치요. 이걸 항상 잊지 말라구.》

리도희는 숨을 돌리고나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당시의 신문들은 문태석을 무역회사에서 파견된 홍콩지사장인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실상 엉터리였소. 그는 무역회사사람이 아니였소. 당시 우리는 문태석을 여러 각도에서 조사했소. 우리가 알아본데 의하면 원체 그는 충무조선소에서 설계기사로 일하였고 여러달전에 사직을 하고 홍콩으로 옮겨왔더군. 좀더 자세히 알아보니 조선소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느 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고 또 어느 기업체에서 발동기기술자로 종사한 사실도 있었소. 그런 그가 안해를 찾아 싱가포르로 왔다가 이북에 랍치될번 하였다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왜서인지 이상한 감촉이 들었소. 첫 순간에 나는 그가 신용할수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소.》

리도희는 잠시 눈을 감고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문태석은 싱가포르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도망쳐 곧장 우리에게로 왔다고 주장하였고 언론 또한 그렇게 보도했는데 실은 그것조차도 거짓말이였소. 우리는 사실 미국대사관에서 문태석을 인도해왔소. 당시 미국대사관에서는 부인을 찾기 위해 북한대사관에 갔다가 랍치된 후 곧 탈출한 한 사나이가 자기네 대사관으로 도망쳐와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하는데 시끄러우니 데려가라고 전갈을 보내왔소. 그네들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서울에 주재하고있는 미국대사관을 통해 청와대에도 그 사실을 알렸소. 청와대에 직접 알릴만큼 정치적인 사건은 아닌것 같은데 그네들이 왜 그렇게 성급했는지는 지금도 참 수수께끼요. … 나는 그 사실을 전달받고 곧 몇사람을 미국대사관으로 보내여 문태석을 인도해오도록 하였고 인차 그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소. 문태석은 첫마디에 북한에 랍치되였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조사해보니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발견되였소. 우선 특이한것은 그가 갖고있던 려권에 홍콩의 출국도장이 두개 찍혀있었던 사실이였소.

그의 말에 의하면 1월 4일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니 그가 홍콩을 떠난것은 1월 4일일수밖에 없소. 그런데 그의 려권에는 1월 3일 홍콩을 떠났다가 그날 되돌아와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떠난것을 확인하는 도장이 찍혀있었소. 우리는 그에게 그 리유가 무엇인가고 물었소. 이에 대해 그는 원래 1월 3일 싱가포르로 오기 위해 수속을 하고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비행기의 고장으로 인해 출발이 하루 늦춰졌다는것이였소. 그래서 입국도장을 찍고 그날 밤엔 항공회사에서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인 1월 4일 싱가포르에 오게 되였다고 해명했소. 그럴수도 있겠다싶어 알아보니 문태석이 짚은 홍콩비행장에서는 그날 비행기고장사고가 없었다고 하였소. 또 다른 의문점은 항공회사에서 정해주었다는 호텔이 당시에 그가 살던 집에서 불과 수백메터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던것이요. 그래서 우리가 물었소. <비행기출발이 하루 늦춰졌으면 집에 가서 자지 왜 호텔에서 잤느냐?> 하고 말이요. 그는 안해를 데려간 사람들로부터 련락이 언제 올지 몰라 호텔에서 잤다고 하였소. 우리가 <련락이 오면 집으로 오지 않겠는가, 그들이 항공회사에서 잡아준 호텔을 어찌 아느냐?>라고 물으니 그는 련락은 호텔로 오게 돼있었다고 그냥 우기였소. 그의 진술은 대체 이런 식이였소. 그래서 나는 그의 주장을 전혀 신뢰할수 없었소.》

리도희는 자기의 말을 주의깊게 새겨듣는 김현철에게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나타났소. 서울에서 문태석랍북미수사건에 대한 공개기자회견을 진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던거요. 인차 안기부의 국장을 비롯해서 여러명이 날아왔소. 그들은 우선 문태석을 넘겨준 미국대사관을 찾아갔었고 다음에 그를 심문한 후 즉시에 기자회견을 가지려고 했소. 그러나 난 반대했소. 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하는 문태석을 앞세워 기자회견을 하는것이 께름했소. 그러지 않아도 모순투성이인데 일단 기자회견까지 벌려놓으면 촉수가 예민한 외국기자들한테 허점만 드러내보이고 국제적인 물의와 망신을 초래할것 같아서였소.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주견없는 외교관이라는 불명예를 당하고싶지 않았소. 그래서 싱가포르정부가 이 기자회견에 강한 반대의견을 표시한다는 구실을 내댔소. 물론 내가 꾸며낸것이였지만 그들에게는 내 말의 진실여부를 확인할 여유조차도 없었던 모양이요. 결국 리득보다 손실이 더 많을수 있다는 내 주장이 먹혀들어 기자회견은 싱가포르가 아닌 타이의 수도 방코크에서 열리게 되였소. 대신 후날 <주재국 싱가포르가 아닌 타이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는 리유로 나는 시말서를 써야 했고 그해 봄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로 조동되는것으로 내 운명의 막은 내리고말았던거요. 그곳에서 나는 몹쓸병을 만나 거의 죽을번 했다오.》

김현철은 리도희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에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문태석랍북미수사건의 배후에 싱가포르주재 미국대사관도 관여되여있는것은 아닙니까?》

리도희는 흰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국대사관이 이 사건에 어느 정도 개입되여있는지는 알수 없소. 다만 내가 확신적으로 말할수 있는것은 랍북미수사건을 처음 알려온것이 싱가포르주재 미국대사관이였다는것과 안기부사람들이 싱가포르에 당도하기 바쁘게 그곳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거요. 하기야 그 사람들의 승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수 없을테니까.》

김현철은 미간을 쪼프렸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어느 잡지에서 본 글이 생각나는군요. <미국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한국의 정치를 론한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미국은 한국정치의 존재양태를 규정해왔고 규정하고있으며 또 앞으로도 규정해나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것임에 틀림없다. 정치뿐아니라 그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국가적좌표 그자체를 미국이 결정해왔다고 말할수 있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이 그랬으며 지난 전쟁시기에도 그랬다. 말하자면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미국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해온 운명의 녀신이였다.>, 정말 비극중에서도 희비극이라고 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러한 사실을 당시의 어느 신문에서도 게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겠지. 외무장관이라는 사람의 방에 미국경호원들이 탐지견을 끌고 들어가도 항의는 고사하고 절대복종해야 하는 판국이니…》

리도희는 응당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김현철은 그의 말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항간에서 《장관실의 개소동》이라는 말로 통하는 그 사건은 김춘옥사건이 터지기 이태전에 있은 일이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서울에 온 미국무장관과 남조선 외무부 장관(당시)사이의 회담이 《정부》청사에 있는 장관실에서 열리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회담을 앞두고 두명의 미국경호원이 도이췰란드산 세퍼드를 끌고 귀빈용승강기까지 리용하면서 장관실에 나타났다. 폭발물과 무기 등이 감추어진것이 없는지 안전상태를 확인한다는것이였다.

제지해나섰던 비서실 직원들은 위협조의 호통질 한마디에 대번에 밀려나고말았다. 가관은 수색을 마치고 철수하는 경호원들과 승강기에서 마주친 외무부장관의 태도였다. 그는 모욕감에 벌개진 얼굴로 항변은 고사하고 《개까지 동원했구만.》 하고 외마디말만 하였다.

이 사실을 냄새맡은 한 기자가 《미국무장관이 왜 왔는지 제대로 분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개훈련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확실한것은 미국수색견이 우리 정부의 고위관리들보다 우대를 받은 사실이다.》라고 야유하는 기사를 써냈다.

더 놀라운 일은 그후에 있었다.

서울에서 회담을 마치고 필리핀에 들린 미국무장관일행이 그 나라의 대통령관저를 방문하면서 수색견을 끌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단호한 거부에 눌리워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것이였다.

이 정도의 수치나 모욕쯤은 약과에 불과하며 이 땅의 《외교사》라는것을 파헤쳐보면 가슴을 치며 통탄하지 않을수 없는 민족적수난과 오욕의 비화들로 가득 채워져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이다.

상념에서 깨여난 김현철이 취재의 각도를 예리하게 세워갔다.

《문태석이 자기의 안해가 이북의 간첩이라고 주장했는데 물질적증거를 제시한것은 없었습니까?》

《안기부에서 그 무슨 조사라는것을 한 다음 그 녀인을 이북공작원으로 확정했소. 그 이상 어떤 증거가 필요했겠소. 우리는 모두 단순론리에 습관된 사람들이요. 안기부에서 간첩이라면 간첩일수밖에 없소. 랍치미수사건이라고 공개하였으면 반드시 랍치미수여야 했소. 만일 어떤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를 하는 경우에는 그 어떤 외교관도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되는것이요.》

김현철은 이 늙은이의 말재주에 은근히 호감을 가지며 물었다.

《그때 싱가포르에 왔던 안기부의 요원들이 누구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습니까?》

《대체로 가명을 쓰고있는터라 알수 없었소. 그러나 책임자만은 국장이라는 직무를 가지고있는 풋낯이나 알던 사람이였소. 안기부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리기철이라고 불렀소. 하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주 이름을 바꾸기때문에 그게 본명이였는지는 자신이 없소. 하지만 그 사람은 내가 기자회견을 반대하자 1970년대에 있은 유럽주재 어느 외교관의 의문사를 상기시키면서 꽤나 위협을 하더군. 지금은 어디서 뭐나 해먹고 사는지…》

리도희는 지나간 세월이 기가 막힌듯 혀를 찼다.

김현철은 리기철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후에 문태석을 만난적은 없습니까?》

《타이로 떠난 후로 만난적이 없소. 문태석은 며칠후 김포비행장에서 2차기자회견을 가졌는데 녀간첩에게 속아 결혼생활을 하다가 북으로 랍치당하려던 순간 용감하게 탈출하였다면서 활극담을 신나게 이야기하더군.》

김현철은 리도희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었다.

《선생님도 믿기 어려운 문태석의 진술을 전문가라고 할수 있는 안기부요원들이 믿은것은 무엇때문이였다고 생각되십니까?》

리도희는 알릴듯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난 안기부사람들이 몹시 서두른다는 느낌을 받았소. 그 사람들한테서 취조를 받은 후부터 문태석은 더욱 모순되는 발언을 하면서 괴이하게 행동하는것이였소. 그래서 안기부패들이 강심제도 주사하고 진정시키는것을 보았소. 확신할수 있는것은 안기부사람들이 사건의 진행과정은 무시하거나 간략해버리고 결과만을 중시했다는거요. 아마 서울에서 그에 대한 독촉이 불같았던 모양이요.》 김현철은 계속 물었다.

《문태석이 홍콩에서 비행기고장으로 하루밤 묵을 때 집으로 들어가지 않은것은 집에 꺼리는것이 있거나 들어가서는 안되는 일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생각해보신적은 없습니까? 김춘옥씨의 시체가 후날 그의 집에서 발견되였습니다. 결국 그때 김춘옥씨는 이미 죽은것이 아닐가요?》

《십분 가능한 예측이요.》

《그렇다면 문태석은 살인용의자일수도 있다는 설이 섭니다. 또 김춘옥의 시신이 집에 있기때문에 현장부재증명을 위해서 일부러 호텔을 예약한것일수 있다는 의심도 듭니다. 만일 김춘옥씨가 간첩이라면 문태석도 한패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수사전문가가 아니지만 문태석의 진술이 허위일수 있다는걸 이미 타산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인 안기부의 요원들이 그것을 무시하고 기자회견을 강행한 목적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왕년의 외교관은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젊은이의 집요성에 탄복하오. 하지만 이런것도 생각해보시오. 김춘옥은 서울에서 간 녀성이라는것! 이게 출발전제요. 홍콩에서 문태석과의 결혼! 언제 한 결혼인지는 나도 모르오. 랍치작전의 실패와 김춘옥의 죽음! 그 장소들과 시공간에 대해서도 나는 알지 못하오. 이북의 정보기관이 랍치작전의 실패와 활동현지에서 자기의 첩자를 살해한 리유의 타당성에 대한 설명! 내가 어떻게 그에 어울리는 대답을 할수 있겠소? 한마디로 산 사람의 증언과 죽은 사람의 침묵사이에 어떤 련관성이 존재하는가? 문태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혹시 이런것까지 묻고싶은게 아니요? … 이쯤하기요. 문제를 제시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해결하자면 대단히 많은 공정과 시간이 필요한 법이요.》

김현철은 별안간 가슴이 답답해왔다. 리도희의 대답은 동문서답격이지만 중요한 문제점들을 시사해주기도 했다. 그는 제나름의 결론은 가지고있었으나 입밖에 내는것을 서두르지 않고있었다. 과시 로련한 외교관다운 처신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는 김현철자신이 결론을 내려야 했다.

머리속에서는 리도희가 암시해준 질문들이 벌떼처럼 웅웅거려댔다. 그것은 모순점을 파고드는 젊은 의지가 타번지는 소리같기도 했다. 김춘옥은 돈을 벌기 위해 홍콩으로 갔다. 그런 그가 간첩이라면 홍콩에서 지낸 5년사이에 흡수되였을 가능성이 높다.

식당이라는 정탐활동의 장소를 마련하고 랍치대상을 유혹했을것이다. 그렇다면 빈틈없이 준비된 공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문태석이 단신으로 랍치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아무런 전문훈련도 받지 못한 그가 아닌가. 교원이든 기업가이든, 그 무슨 발동기기술자이든 조선소의 기사이든 제스스로 함정으로 걸어들어간 인물이 어느 전문가의 도움도 없이 치밀하게 꾸며지고 실행된 랍치상태로부터 탈출하였다. 그리고 랍치사건의 주모자는 책임을 지고 자택에서 살해당한다?! … 이렇게 추리를 이어가던 김현철은 리도희의 헛기침소리에 사색에서 깨여났다.

그가 자기의 실례를 깨닫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리도희가 말을 던졌다.

《한가지 묻고싶소. 당신은 말그대로 기사를 내는것이 이 취재의 목적이겠지?》

《예.》

《그렇다면 그 취재대상은 나까지로 마무리했으면 좋겠소. 일단 안기부가 개입되여있다는것과 이 사건의 의문점들을 나름대로 제시해준것은 그만큼 이 취재의 뒤맛이 재미없을터이기때문이요. 그저 과거의 의문사에 대한 의혹을 표명하는 정도의 기사였으면 하오. 늙은게 주제넘게 참견한다고 여기지만 말고 새겨듣소. 뒤일은 다른이들에게 떠맡기오. 나도 진실을 밝히고싶지만 그 진실을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 잃고싶지는 않소. 나는 바로 그렇소. 사람이란 누구나 리기적인것이요. 당신도 기자라니까 특이한 기사를 쓰는게 목적이 아니겠소? 내가 준 기사거리로도 센세이숀은 일으킬수 있으니 이쯤해서 멈추오. 년장자로서 하는 충고이니 명심하오.》

연희가 가지고 온 차를 마시고난 리도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희는 나를 바래워주려무나.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이 늙은이를 외면하진 않겠지?》

자기를 흘깃 쳐다보고는 마지못해 따라가는 연희의 뒤모습을 보며 김현철은 입을 다시였다.

연희를 취재에 끼여넣지 말라는 로골적인 암시였던것이다. 하긴 이 사건의 배후에 안기부가 있었다면 그의 우려는 공연한것이 아닐수도 있었다.

김현철은 자기가 얻은 소득이 적지 않다는것을 깨닫고있었다. 무엇인가 짙은안개에 가리워져있던것이 보일듯말듯 그에게 다가오다가 사라지는것 같았다. 반가운것은 로숙한 이전 외교관도 분명 자기와 동일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는것이였다. 그것을 놓고봐도 문태석의 주장이 허위라는것은 명확한 사실이며 어떤 유령이 그 주위를 배회하는것은 확실했다.

김현철은 멀어져가는 리도희와 연희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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