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회)

제 4 장

2

 

권봉석은 뒤짐을 진채 관리위원회마당을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요즘 그는 사무실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고개를 수굿한채 걸음을 옮기던 그는 밑둥굵은 버드나무의 푸른 가지들이 바람에 흐느적이는 모양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가 한창 젊었던 시절에도 이 버드나무는 지금처럼 푸르싱싱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푸르른 나무와 마주서고보니 은연중 자기가 이젠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희여져도 마음만은 늙지 않는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늙음은 청춘을 간직한다는 말도 있는것인지 모른다.

권봉석은 지금껏 자기의 로쇠를 부정했고 여전히 혈기가 왕성하다고 자부해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 그런지 자신의 정력과 사업의욕에 대해 의심해보게 되는것이였다. 요사이 청년염소반건설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돌이켜볼 때 은연중 그런 생각이 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이모저모 몸도 마음도 편안치 않았다. 더우기 순미가 굳이 배등령을 넘어간지 며칠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생각은 더 깊어졌다. 군도시건설대를 비롯한 건설부문 기업소들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으나 그가 간 곳을 알수 없었다.

세멘트공장에라도 찾아간것이 아닐가. 아니면 혹시 콤퓨터조종실설계때문에 도에 간 안홍진을 찾아간것이 아닌지. …

버드나무주위를 빙빙 돌던 권봉석은 큰길에 나섰다. 염소작업반에 가볼 생각이였다.

한여름의 새벽공기는 사뭇 상쾌하였다. 멀리 덕으로부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손바닥만 한 오리나무잎사귀들이 와삭와삭 설레이고 방목지의 풀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둔덕길을 따라 걷던 권봉석은 누군가 마주오는 인기척에 머리를 들었다.

뜻밖에도 손에 파란 비닐바께쯔를 든 림송심이 다가오고있었다. 어쩐지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례사로운 어조로 물었다.

《림동무가 새벽에 웬일이요?》

림송심은 잠시 머밋거리더니 배등령을 넘어간 딸이 걱정도 되고 건설현장에 일손이 딸릴것 같아 식당일을 돕고있다고 했다.

《그래 염소반에선 무슨 일을 합디까?》

《밤낮 배꼽바위골까지 가서 석회돌을 실어내리고 옹기장골에 가서 진흙을 파오고있어요.》

《그런데 왜 내려오우?》

《부식물을 좀 가져가려구요.》

《부식물이야 남새반에 가서 소달구지로 실어와야지. 바께쯔 하나 가지고 뭘 가져가겠소?… 림동문 혹시 순미가 어데 가있는지 짐작이 안 가오? 군에는 없는것 같소. 군도시건설대랑 전화를 걸어봤는데 왔다가 인차 갔다는거요. 도대체 어데 가있는지. …》

림송심은 웬일인지 대꾸를 안했다. 얼굴을 돌리며 옷자락으로 눈굽을 찍었다. 권봉석은 가슴이 아릿했다. 딸이 깊은 밤에 배등령을 넘어갔으니 걱정이 여간 아닐것이다.

《림동무, 혹시 순미가 도에 올라가있는 홍진이를 찾아가지 않았을가?…》

송심은 놀라는 눈길로 권봉석을 쳐다보았다.

《아니, 거긴 왜요?》

《순미가 염소반건설을 시작하면서 그 사람한테 기대가 컸소. 이번에도 콤퓨터조종실설계때문에 도에 가지 않았소. 순미가 안타까와하던 나머지 그곳에 간거나 아닌지…》

《웬걸 거기까지 갔겠나요.》

《하긴 나 혼자 생각이요.》

권봉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홍진이 그 사람이 제 아버지를 닮아 여간 똑똑하지 않다니까. 한마디로 실력있는 재간둥이거던.》

《아버지라니요?》

《나도 얼마전에야 알았는데 그 총각이 글쎄 안문찬이 아들이라오.》

《안문찬이라니요, 어느 안문찬이?…》

《우리가 젊었을 때 면양반 반장을 하다가 소환돼간 사람 말이요. 지금은 도에서도 제일 큰 종합목장 지배인을 하지 않소.》

림송심의 손에서 바께쯔가 뚝 떨어져내렸다. 그는 온몸의 맥이 빠지는듯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니, 왜 그러오?》

《그게 정말인가요?》

그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권봉석은 그제야 송심의 심정을 알아차리고 혀를 찼다.

《림동문 아직도 그때 생각이요?… 녀자들이란 참…》

《그래요. 왜 그런지 잊혀지지 않는군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어쩐지 믿어지지 않는군요, 그 총각이 안문찬의 아들이라는게…》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였다.

《글쎄 나도 리당비서동무가 알려주어서야 알았소. … 홍진이 그 사람이 비밀에 붙여달라고 했다누만. 아버지의 고향을 위해 떳떳한 일을 해놓은 다음에야 마을사람들한테 인사를 하겠다고 말이요.》

송심은 대답을 못했다. 그의 표정이 하도 어두워지는 바람에 권봉석은 해묵은 감정은 대담하게 버리라고 충고를 주었다.

《글쎄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 없는걸 어찌겠나요, 내가 지나친지는 모르겠지만…》

《허참, 내가 공연히 그 사람 말을 한것 같구만.》

《제가 지나쳤다면 용서하세요.》

송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쪽으로 허청허청 걸어갔다.

권봉석은 그의 뒤모습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니 안문찬에 대한 고까운 감정을 여전히 풀지 못하겠다는거지. 그것참 난사는 난사다. 이제 홍진이가 오면 순미와 늘 붙어다니겠는데 저 로친이 무슨 일을 치겠는지 걱정이군. …)

권봉석은 염소작업반 석회로에 먼저 들렸다. 코김을 힝힝 내불며 석회돌을 까던 청년들이 저마끔 인사를 했다. 석회로옆에 새로 쌓은 기와로에서 불길이 이글거리고있었다. 조금 둔덕진 곳에 수평식로를 만들고 풍덕땅에 흔하디흔한 붉은진흙으로 기와를 구워내게 만든 로였다. 농장에 기와분조가 있는 조건에서 염소작업반건설에 필요한 기와를 거기서 생산할수도 있었지만 권봉석은 기와문제는 썩 후차의 일로 여기고있었다. 헌데 여기서는 벌써 많은 량의 기와를 쌓아놓기까지 했다.

며칠전 리당비서 박성복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순미반장이 벌써 기와까지 구워내는것을 보니 정말 생각이 많아지더군요. 위원장동지, 난 그의 모습에서 그 어떤 난관이 앞을 막아도 끝까지 내세운 목표를 수행하고야말겠다는 맹세를 보았고 눈앞에 펼쳐질 현대적인 염소생산기지가 보이는것만 같아 가슴이 다 울렁거리더군요. 위원장동지, 이왕 결심하고 시작한 일이니 그들을 끝까지 밀어줍시다. … 새삼스러운 말 같지만 우리 조국은 세상을 깜짝 놀래우며 사회주의도 건설했고 공업화도 완수하고 이제는 인공지구위성까지 쏴올리면서 세상이 보란듯이 머리를 쳐들고 살아나가지 않습니까. 조국의 미래가 새 세대 청년들의 손에 쥐여져있는데 그들의 일을 잘 보살펴주고 적극 떠밀어주어야 우리 풍덕땅이 더 젊어지고 아름다워질게 아닙니까!》

리당비서의 눈빛은 퍼그나 진중하였다.

목에 수건을 걸치고 기와로아궁에 굵은 통나무토막들을 집어넣던 김희문이 권봉석을 보자 허리를 폈다.

《건설을 중지하라고 했다면서요?》

《음, 그랬지. 내 오늘 김동무한테 비판을 받으러왔소.》

《뭐 나한테서 비판을 받겠소. … 우리도 위원장의 심정을 다 안다우.》

권봉석은 김희문이에게 담배를 권하고 자기도 한대 피워물며 나무토막에 걸터앉았다.

《난 그저 나나 위원장이나 청춘시절에 대를 이어 충정을 다하겠다는 깨끗한 마음을 안고 노래를 부르며 일하던 그때와 같은 격동적인 시대에 순미반장 같은 새 세대 청년들이 서있다는 생각을 하면 한가지 일이라도 착실하게 도와주고싶은 마음뿐이요.》

권봉석은 묵묵히 담배연기만 내뿜었다. 김희문의 말은 의미심장한것이였다.

희문은 기와로에 시험적으로 찰진흙을 가지고 빚은 벽돌블로크를 넣은 일이며 신종선이네들이 배꼽바위골에서 석회돌을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일을 하자고 마음먹은 사람들에게야 무엇인들 난관이 되랴 하는 생각을 하며 권봉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을로 내려오면서 자신을 다시금 돌이켜보았다. 후세대를 대하는 전 세대의 관점과 태도가 고향땅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헌신을 규정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청색바탕에 진달래꽃무늬가 있는 달린옷에 흰 구두까지 신은 정보배가 바삐 다가오며 인사를 한다.

《아침부터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만났구만요.》

《정동무가 무슨 일로 나를?…》

권봉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위원장동지, 우리 옥련인 아무래도 그 태식이란 청년과 맞지 않아요. 솔직히 전 기분나쁘답니다. 옥련이도 그 사람이라면 천길을 뛰는거구 어머니인 나로서도 반갑지 않구요. 글쎄 엉터리사진까지 들고다니며 남의 처녀망신을 시키는 그런 총각이 무슨 씨가 박혔겠어요.》

《그래서 말하자는건 뭐요?》

《우리 옥련일 염소반에서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달라는겁니다. 그 총각과 함께 있다가는 무슨 망신을 더 할지 모르겠어요.》

권봉석은 고개를 흔들며 지금 염소반이 어떤 어려운 형편에 있는지 알기나 하는가고 질책조로 말했다.

《아니, 위원장동지가 염소반건설을 중지시켰다던데요?》

권봉석은 이발이라도 쏘는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말은 하지두 마오. 옥련일 염소반에서 데려내온다는건 되지도 않을 일이요. 본인의 의사도 그렇지 않을거구. 더구나 순미반장이 놔주지 않을거란 말이요.》

권봉석은 할말을 다 했다는듯 몸을 돌렸다.

정보배는 그냥 따라서며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순미가 이번에 입은 큰 피해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배등령을 넘어간게 뻔한데 지금껏 나타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는지 알게 뭔가고 했다.

《보배동무, 그만하오. … 아무리 딸이래도 제 문제는 제가 결정하도록 하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러니 위원장동진 우리 딸에 대한 생각이 꼬물만큼도 없다는 말씀이군요, 망신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야박한 말 같지만 위원장동지도 아들을 대학공부시켜서 도회지에 떨구지 않았나요. 다 남의 말은 하기 쉽답니다.》

권봉석이 허거프게 웃자 정보배는 더 승이 올랐다.

《좋아요, 난 무조건 우리 딸을 배등령너머에 시집보내겠으니 그런줄 아세요.》

정보배는 치마바람을 일구며 힝 돌아섰다.

(허허참… 순미가 힘들겠어. )

권봉석이 관리위원회마당에 들어서니 박성복리당비서가 관리위원회 계획부원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맞아주었다.

방금전 순미한테서 전화가 왔다는것이였다.

《ㅊ세멘트공장에 있는데 인차 돌아서겠답니다.》

《세멘트라도 한방통 싣고온답니까?》

《글쎄 그야 알겠습니까? 그런데 아침부터 어델 가셨댔습니까?》

권봉석은 염소반으로 올라가다가 림송심을 만났던거며 석회로에서 김희문이한테서 들은 내용들을 그대로 말했다.

《그러니 결국은 청년염소반에 더 세찬 불길이 타오르는셈이군요. 순미반장이 그곳 벽돌공장에도 들렸댔는데 시제품벽돌을 가지고와서 질좋은 블로크를 꼭 만들어내겠다는겁니다. 이자 계획부원동무와도 그 이야기를 나누댔는데…》

그는 뒤말을 인차 잇지 않았다.

《청년염소반이 난관을 극복하고 불길을 더 세차게 지펴올렸는데 과연 그 불을 끌수 있겠습니까?… 이제 인차 군당전원회의가 열리는데 거기에서도 기본은 풀먹는 집짐승기르기를 어떻게 하면 더 힘있게 벌리겠는가 하는 문제가 토의됩니다. …》

박성복은 긴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두 일군을 남겨놓은채 리당사무실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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