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비출신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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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막거리아래 주막집에서 김을지와 눈물겹게 헤여진 장영실은 말을 부지런히 다그쳐몰았다.

길을 가면갈수록 김을지가 그냥 따라오는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고 그의 앞날이 근심스러워졌다.

사람의 한생에 한번 행운이 나진다고 하는데 김을지에게도 그런 행운이 한번 왔다가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굶어죽게 된 사랑하는 가족들을 살려주려고 행차를 멈추고 조처해준 임금의 하해같은 은총이 칠색무지개처럼 순간에 스러진것이다.

그래서 김을지는 《산당》패에 들어갔고 오늘은 양지현감을 통쾌하게 처단하였다. 그 뜻은 장하고 기개 또한 나무랄데 없지만 장차 그의 운명은 어찌되겠는가. 어떻게 하면 김을지가 세상밖으로 나와 영아와 가정을 이루고 사람답게 살수 있을가. 그는 이같은 생각을 머나먼 행길에 하염없이 새기며 가고갔다.

장영실은 김을지와 작별한지 나흐레만에 드디여 동래고을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장산봉고개마루에 올라섰다.

그는 타고온 가라말을 새초가 싱싱하게 자라오른 곳에 놓아주고 다정하게 말의 목덜미를 자근자근 두드려주었다.

《인젠 다 왔다. 네가 나를 태우고 오느라 수고하였구나. 우리 잠간 쉬였다가자.》

서울을 떠난지 꼭 여드레만에 다달은 동래고을 저 멀리 흰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다안쪽으로는 시누런 낟알밭들이 펼쳐졌는데 그한가운데로 동래강이 흐른다.

저기 보일듯말듯 가물가물 바라보이는 해운대 온천, 푸른 송림이 우거진 송정동, 서쪽으로 치우친 수영동이 한폭의 그림처럼 안겨오는 곳!

아버지, 어머니 사시던 오막살이집,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관노, 관비로 어린 오누이가 눈물속에 자라던 단간 초가집, 송정동과 수영동사이에 고래등같은 관가는 보이지만 정다운 고향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앞에는 고향집이 하늘가득 어려왔다. 그는 임금의 부름을 받고 이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갔었다.

장영실은 자기도 모르게 깊은 추억에 잠겨들었다.

추억이란 언제나 지난날의 고달픔과 괴로왔던 일들은 다 세월의 물결속에 흘러가고 사금바가지에 금싸래기만 남듯이 한생에 못잊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활만이 남는다. 지금 장영실의 추억이 바로 그렇게 한없이 소중하였다.

장영실이 아직 관노의 멍에를 벗지 못했던 어느해 가을날.

장영실은 고을군기소의 장공인들과 함께 새로 창안제작한 활촉주형에 쇠물을 붓고있었다.

주형은 길이 두자, 너비 반자, 두께 세치가 되는 두개의 옥돌판대기에 꼭같은 활촉모형의 홈이 패여져있다.

이 두 판대기를 맞추면 활촉홈들이 일치하게 맞아서 옹근활촉모형의 공간이 생긴다. 여기에 쇠물이 흘러드는 구멍이 작은 콩새의 눈처럼 동그랗게 뚫어져있는데 가장자리를 나팔주둥이처럼 만들어놓아 쇠물이 잘 흘러들도록 하였다.

장영실은 쇠주걱으로 날렵하게 한구멍씩 살짝살짝 쇠물을 부어나갔다. 한줄에 스물다섯개의 구멍이 두줄로 나있으니 쉰개의 구멍이다. 쇠물은 기다렸던것처럼 재빨리 구멍으로 흘러들어가서는 꼴깍 차올라 마치 빨간 오미자열매처럼 보였다.

장영실은 잠간 사이에 쉰개의 구멍에 쇠물을 다 붓고 싱긋이 웃었다.

《원, 저렇게도 신통할수가 있나. 굳은 돌판대기에 활촉이 들어가 앉을 자리를 어떻게 파냈을가. 나무에 도장을 새기는것도 아닌데…》

《그러기 장영실이지!》

옆에 서서 쇠물붓는것을 구경하던 중늙은이 하나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암, 그렇구말구.》 하고 껄껄 웃었다.

《그참, 모를 일이야. 쇠물이 구멍에 들어갔다가 녹아붙으면 그걸 떼낼수 있겠나?》

한생 장공인으로 늙어온 텁석부리령감이 신기스럽기도 하고 미타하기도 하여 베감투머리를 기웃거리였다.

《아따, 이 령감쟁이보게. 임자 마누라가 지짐을 부칠 때 지짐판밑굽에 기름을 문지르겠지. 안그런가?》

텁석부리령감옆에 쭈그리고앉았던 맨 상투바람의 늙은이가 텁석부리령감을 허물없이 놀려댔다.

《그거야 우리 로친뿐이겠나. 임자 로친도 그러겠지. 허지만 이건 지짐이 아니라 쇠물이야. 제가 무얼 안다구, 흥.》

텁석부리령감이 코방귀를 내불었다.

《하하하―》

《허허허―》

주위사람들이 한바탕 즐겁게 웃었다.

《내가 왜 몰라. 리치는 같을거야. 지짐짝이 붙지 않게 기름칠을 하는것처럼 주형에도 무엇을 칠하고 쇠물을 붓는걸세. 헌데 그 칠감은 누구도 몰라. 서울 리천대감이나 알겠는지…》

당시 공조참판 리천은 여러가지 총통(화포)과 신기전 같은 신묘한 병쟁기들을 만들어냈고 금속활자도 주조하고 나라의 과학발전에 요긴한것들을 만들어내여 소문이 났었다. 일반백성들은 다 몰라도 기술을 숭상하는 장공인들속에서는 소문이 크게 나서 나라의 남쪽 한끝에 있는 동래현 장공인들에게도 미쳐왔었다.

장영실은 리천대감을 보지 못하였지만 마음속으로 그를 끝없이 존경하였다.

《무슨 말씀이오이까. 칠성이 할아버님, 리천대감께서는 화포를 꽝꽝 부어내는분이신데 쬐꼬만 활촉에 대비나 되옵니까.》

장영실은 송구히 얼굴을 붉히였다.

주형틀의 쇠물구멍에 빨갛게 보이던 쇠물이 서서히 검푸른색으로 변하였다. 이때를 기다리던 장영실은 주형의 두 옥돌판대기를 고정시킨 쐐기들을 뽑아냈다. 주위사람들이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장영실의 손놀림을 바라보았다.

장영실은 나무망치로 주형을 가만가만 두드렸다. 그러자 맞물려있던 주형의 왼쪽, 오른쪽이 조금씩 갈라지고 나중에는 구운 조개같이 입을 벌리였다. 그속에 조개살이 내보이듯이 쇠활촉이 드러났다.

《히야!―》

모두 하나같이 외마디 탄성을 내질렀다. 첫눈에도 얼마나 탄탄하고 매끈하고 여무진 쇠활촉이냐. 모래와 진흙으로 빚은 주형에 쇠물을 부어만들 때에는 매번 주형을 빚고 매번 허물어서 활촉을 털어내느라고 품인들 얼마나 많이 들였던가. 또 그렇게 부어낸 쇠활촉은 형태가 찌그러지기도 하고 표면도 거칠고 예리하지 못하여 버리는것도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주형을 빚었다허물었다 하는 일도 없이 맵시있고 멋들어진 쇠활촉을 연방 부어낼수 있게 되였다.

장영실의 눈굽에 눈물이 맺혔다. 이 옥돌주형들을 성공시키는데 바친 노력은 헤아릴길 없었다.

실패하고 또 실패하면서 쇠를 다시 녹이고 또다시 녹이면서 숯을 한정없이 없애버렸다.

어느 하루는 고을원이 상투끝까지 성이 뻗쳐서 장영실을 묶어 계하에 꿇어앉혔다.

《네놈이 쇠활촉을 만들어낸다고 하면서 고을의 숯낟가리를 다 허물어먹구 무엇이 모자라 참나무를 또 찍어? 이놈, 네가 지금껏 못만들어내는것이 없었구 못고쳐내는것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심사루 백날이 넘도록 숯만 태우느냐? 바른대로 말해라. 네놈이 고을을 말리워버리자고 잔꾀를 쓰는도다. 여봐라, 저놈을 사정두지 말구 매우 쳐서 제 입으로 토설하도록 해라.》

장영실은 병쟁기라면 병쟁기, 농쟁기라면 농쟁기, 그 무엇이나 막히는데가 없이 수리하거나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지어는 량반댁안주인들의 값비싼 치레거리들도 유감없이 고쳐내기도 하였다. 동래고을에서는 성을 보수하거나 보를 막든지 무슨 토목공사를 하든지 장영실이 참녜해야 일이 잘되는것으로 알았다.

고을원이 이런 장영실을 모르지 않았다. 헌데 그 쇠활촉이 무엇이여서 제꺽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 많은 숯낟가리를 없애고 밥만 축낸단 말이냐. 이는 분명 딴 속심이 있는것이 틀림없다.

사령들은 장영실을 매우 치라는 사또의 어명을 받았지만 그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곤장을 들어올릴념을 못하였다.

《이놈들, 어서 형장을 치지 못하겠느냐?》

고을원이 두눈을 부릅뜨고 동헌대들보가 무너져내릴듯이 소리쳤다.

《사또님께 아뢰오. 소인은 쇠활촉주형을 만들고있는 장영실을 도와주는 장공인이옵나이다.》

흰무명저고리에 흰무명머리수건을 이마에 동인 사나이 하나가 불쑥 섬돌앞으로 나와 서서 량수거지를 하였다. 최서방이였다.

최서방은 고을원이 장영실을 붙잡아다가 형장을 친다는 소리를 듣고 《아니 장영실을 어찌 친단 말인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하고 달려온 참이다.

최서방은 《이번에 장영실이 고을의 숯을 많이 쓴것은 사실이오나 그가 만들고있는 쇠활촉은 그 숯보다 몇갑절 중한것이옵니다. 이같이 중한것을 만들어내기는 매우 어려운지라 고을의 숯을 많이 쓴것은 막부득한 일이오니 용서해주기를 바라나이다. 장영실은 이 몇달동안 그것을 만드느라고 밤잠도 잊고 끼식도 잊었던고로 몸이 저렇듯 허약해졌나이다. 이 사람은 저 하나를 위해 몸이 쇠하도록 일한것이 아니옵고 고을을 위해 제 한몸을 아끼지 않았사오이다. 저 몸에 형장을 치면 목숨을 부지할수 없소이다. 장영실은 천한 관노라 해도 인명이 아까운 사람이옵니다. 소인이 이 장영실이 대신 형장을 맞겠나이다.》 하고 계하에 엎드리였다.

그러자 곤장을 들고 차마 장영실을 치지 못하고있던 사령 하나가 용기를 내여 최서방곁으로 나와 부복하며 입을 열었다.

《이 장영실은 뛰여난 재기와 착한 마음을 안고 해놓은 일이 많사와 소인으로서는 도저히 곤장을 들수 없나이다. 바라건대 이 사람을 용서하옵시면 사또님의 덕망이 빛날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여론이 좋지 않을것입니다.》

그의 집에서도 부모처자들이 장영실이 만들어준 수차로 물을 떠올리면서 농사를 짓고있었다.

《숯은 이제라도 얼마든지 구워낼수 있지만 저 사람이 형장아래 숨지면 저 사람같은 재사를 다시 얻어내지 못하옵니다. 거듭 청하거니와 저 사람의 매를 소인이 맞겠소이다.》

최서방이 이같이 말하고 무명저고리를 벗는다.

형틀에 묶인 장영실의 몸은 볼품없이 여위였다. 잡혀오기 전까지 일하느라고 어지러워진 손, 숯검댕이,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얼굴, 부르튼 입술 허나 눈빛만은 영채롭게 빛났다.

《형님네들, 고맙소이다. 허나 어찌 천한 관노가 맞아야 할 형장을 어르신네들이 맞으리까. … 사또님, 매는 소인이 맞겠사오니 사또께서는 한가지 약속해주기를 바라나이다.》

《무엇이야? 저런 미친놈 보았나. 약속은 무슨 약속? 내 산송장을 치고 살인죄를 지라는 약속이냐? 이놈…》

고을원은 장영실의 엉뚱한 소리에 정말 미치지 않았나 의심이 부쩍 들었다.

《아니오이다. 소인이 매맞는 값으루 한번 더 활촉주형을 만들도록 허락해달라는 약속이나이다. 지금까지 없애버린 숯낟가리는 맹랑히 없어진것이 아니라 소인이 만들고있는 주형을 받들고 솟아있나이다. 이제 한번만 더 하면 성공하옵니다. 소인이 형장이 무서워 그만두면 백날공든 탑이 정말 무너지옵나이다.》

장영실은 두손바닥을 마주대면 손금까지도 꼭 맞는것처럼 주형의 두 옥돌판대기에 파낸 활촉홈들이 실금같은 차이도 두지 않고 맞아떨어지지 않아서 고생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 실패의 원인을 밝혀내고 성공할수 있는 묘리를 찾아낸것이다. 그는 이것을 두고 숯낟가리가 없어진것이 아니라 솟아있다고 하였다. 그처럼 공을 들였다 하여 백날공든 탑이라고 말한것이다.

이것을 알길 없는 고을원은 장영실의 말을 참말 미친놈이 하는 소리로 들었다.

(뭐라고? 다 없어진 숯낟가리가 그대로 솟아있다고? 백날 공든 탑이 어쨌다고? 미친놈의 눈에는 온갖 허깨비가 보인다더니 저눔이 바로 허깨비를 보는고나. 저 눈빛이 이상코나.)

장영실의 눈에는 자기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는 지혜의 불꽃이 타오르고있었지만 고을원은 그것을 제나름대로 미친놈의 눈빛처럼 보았다.

《여봐라, 저놈이 미쳤다. 그까짓놈 풀어놔주어라.》

고을원은 형장 몇대에 장영실이 죽어버리면 미친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소문이 더럽게 날것이고 또 백성들이 보배로 여기는 장영실이 그렇게 되는 날이면 소문에만 그치지 않을것 같았다.

최팔매까지도 매를 대신 맞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화가 복통을 쳤지만 어쩔수없이 장영실을 내버려둘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없었던것을 만들어내기는 이처럼 미칠 지경으로 그 일에 달라붙지 않고서는 바랄수 없는것이였다. …

《그참, 재간은 재간이로다!》

《희한도 할시구!―》

주위에 둘러서서 사람들이 입들을 하― 벌리고 쇠활촉이 떨어져나오는것을 바라보는데 풀무군총각이 《그러니, 요게 하나가 왜놈 하나로구나. 어디 좀 보자. 내가 너에게 귀를 잡고 절을 해야겠다. 리천대감님도 너를 만들어내던가 말 좀 물어보자.》 하고 파르스름한 쇠활촉 하나를 집어들었다가 《에크, 뜨거워―》 하면서 쇠활촉을 내뿌리며 저도모르게 귀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뒤로 벌렁 나가떨어지면서 어떤 사람의 발잔등을 세차게 찧었다.

《와하하… 정말 귀를 잡네그려.》

사람들이 한바탕 떠들썩 웃었다.

《허, 이녀석 리천대감을 시까스르더니 인젠 내 발잔등까지 깨버릴 잡도리구나. 고얀놈같으니.》

사람들은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목소리임자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뜻밖에도 눈처럼 흰 비단도포에 옻칠이 번들거리는 통영갓을 쓰고 목화를 신은 풍채좋은 량반이 우뚝 서있었다. 보기를 처음 보는 낯선 량반인데 위엄스러웠다. 흰 이마아래 검은 눈섭, 크고 밝은 눈, 높은 코마루, 보기 좋은 수염, 그쯘한 체격이 인품을 돋군다.

사람들은 급급히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였다.

량반은 공조참판 리천이였다. 그는 경상도 순무어사로 여러 고을을 돌아보는 길에 동래고을에 당도한것이다. 리천은 논밭에 물을 떠올리는 수차도 보았고 동래성에 올라가 화포도 보았으며 군기소에 들려 활과 창, 칼들을 하나하나 검열해보았다.

모든것이 정예하고 다루기에 편리한것이 다른 고을에 비할바가 아니였다. 백성들과 군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농쟁기나 병쟁기는 어느것이나 장영실이 만들었는데 지금은 으뜸가는 쇠활촉을 만드느라고 수고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리천이 고을야장간을 찾아온것이다. 마침 쇠활촉을 부어내는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울타리를 치듯이 빙 둘러서있는양이 보였다.

그는 슬금슬금 거기로 가서 사람들의 어깨너머로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자기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번잡스럽게 인사례절을 차리느라고 쇠물을 붓는데 지장이 될것 같았기때문이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쇠물을 붓는것도 다 보고 자기를 두고 하는 소리, 더구나 장영실이가 자기를 공경하는 말도 다 들었었다.

그런데 풀무군총각이 자기의 발등을 엉덩방아로 찧어놓은것이다.

《이녀석, 내가 바로 리천이다. 다시한번 나를 시까슬러보아라.》

리천은 짐짓 눈을 부릅떠보이다가 빙그레 웃었다.

풀무군총각은 말할것 없고 아까 《리천대감이나 알겠는지…》 하던 텁석부리령감도 죄송함이 그지없어 어쩔바를 몰라했다.

장영실은 한번만이라도 보고싶었던 리천대감인지라 무등 반가와 《대감께서 어지러운 야장간을 왕림하여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하는 말을 여쭙고싶었으나 감히 발설치 못하였다.

그는 일동을 대표하여 《황송하옵나이다.》 하고 외마디말로 자기의 심정을 담았다.

《다들 일어나게. 그대가 장영실이냐?》

리천은 아직도 부복해있는 장영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렇사오이다.》

《으음, 그대는 큰일을 하였네.》

리천은 장영실의 손을 잡아일으켜 《키는 작아도 그대는 큰사람일세.》 하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리고는 하얀 옥돌주형을 깐깐스럽게 살피며 연해연송 머리를 끄덕이였다.

참으로 훌륭하였다. 서울 군기감에서도 하지 못한 일을 여기서 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면 금속활자도 주조할수 있을것이다.

물론 쇠활촉을 부어내기보다 몇갑절 힘들고 까다롭기가 이를데 없을것이다. 그러나 장영실은 해낼것 같았다.

리천은 흔치 않는 재간둥이를 만난것이 반가왔다.

그는 크게 만족하여 장영실을 대견히 바라보았다.

《나라의 변방에 그대와 같은 보배가 있은줄 몰랐고나.》

장영실은 《그대》라는 부름과 《큰사람》, 《보배》라는 말로 자기를 높이 불러주는 리천대감앞에 무슨 죄를 짓는것만 같아서 황망히 엎드리였다.

《소인은 관노이나이다. 너무 과분한 말씀으로 치하를 하시오니 어찌 몸둘바를 찾으리오.》

《그대가 관노라니 무슨 엉뚱한 말인고?》

리천은 믿어지지 않는듯 그를 지숙히 굽어보았다.

장영실이 재삼 관노라고 여쭙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놀란듯, 실망한듯 낯빛을 흐리면서 한동안 그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대의 재간이 아깝고나. … 이랬든저랬든 그대야말로 고을의 자랑이로다.》

그는 아쉬운듯 장영실을 다시한번 치하하고 자리를 떴다.

리천이 서울로 올라간 뒤에 달포가 흘러서 공조의 서리 하나가 동래에 찾아들었다. 서리는 고을원에게 장영실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올려보내라는 임금의 어지를 전하였다.

장영실이 서울로 떠나는 날, 장영실오누이는 서로 붙들고 울고 또 울었다. 그때 그들의 나이 오빠 장영실은 스무살, 녀동생 영아는 열세살이였다.

《오빠, 오빠― 나도 함께 갈래― 응? 오빠, 오빠야―》

영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오빠를 놓칠가봐 두손으로 장영실의 손을 부둥켜잡고 놓지 않았다.

《오빠가 없으면 난… 난… 혼자서 어떻게 사나 응? 오빠―》

《함께 갔으면 오죽 좋겠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인차 돌아오겠지. … 영아야, 이 오빠도 너없이 못산다.》

장영실은 목이 꽉 메여올라 말을 더듬으며 《영아야, 내 어떻거든 빨리 돌아오마. … 그간… 잘 있거라.》 하고 동생의 눈물도 닦아주고 제얼굴의 눈물도 씻었다. 장영실은 가슴을 찢는것 같은 아픔을 이겨내느라고 몸부림쳤다. 저 어린것이, 세상에 의지가지없는 동생이 밤마다 빈집에서 울고울다가 노그라져 허리를 꼬부리고 잠들었다가도 《오빠야―》 하고 벌떡 일어날 모양이 떠올라 가슴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그는 어서 떠나기를 재촉하는 서리에게 빌었다.

《나리님, 내 동생을 데리고 함께 가도록 허락해주사이다. 저애를 홀로 떼두고 어찌 가오리까. …》

그러자 서리의 낯빛이 당장 푸르딩딩 살아올랐다.

《안돼. 너희들 오누이는 관노, 관비야. 어떻게 제 하고싶은대로 하겠느냐. 여봐라, 라장은 저 계집애를 관가로 끌어가거라.》

영아는 라장의 손에 끌려가며 《오빠야― 오빠야―》 하고 찾으며 울었다.

장영실을 바래주려고 나온 동네사람들도 불쌍한 오누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였다.

영아는 오빠없이 살아갈수 없었다. 이날이때까지 오빠를 부모를 대신해 살아왔다. 뼈도 굳기 전에 관비의 멍에를 메고 마소처럼 부림을 당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래도 오빠가 있어서 웃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나란히 누워 잠도 자고 함께 일어나기도 하였다.

다정하고 살틀하고 착한 오빠, 동네사람들이 무엇을 만들어달라면 아무때나 웃으며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간있게 만들어주어서 칭찬받는 오빠. 바로 이 오빠의 동생이여서 자기도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런 오빠가 없이 어이 살아가랴.

만약 장영실오누이가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는것을 알았다면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작별하였으련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고을원은 장영실이 임금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간다는것을 누구도 모르게 하였다.

량반들이 임금의 부름을 받는다면 그 경사를 족보에 기록해두고 자자손손 가문의 자랑으로 전해가는데 하물며 관노가 그런 영광을 지니다니 량반의 체면이 서는가.

고을원은 이런 리유로 장영실이 떠나는데 나와보지도 않았다.

장영실은 서울에 올라가 리천대감을 만나보고서야 꿈같은 사실을 알았다. 임금의 부름을 받게 된 사연을…

리천은 순무어사로 경상도에 다녀온 사유를 글로 적어서 세종에게 올리였었다.

그는 동래현은 군사일, 농사일이 다 잘되였다고 하였다. 더우기 농사일에서는 가는 곳마다 커다란 수차를 만들어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논밭의 가물을 막고 알곡소출을 늘이고있으며 군사일에서도 성을 잘 수축하여 적이 기여오를수 없도록 기묘하게 쌓았고 활과 쇠활촉을 정예스럽게 만들었는데 특히 쇠활촉은 옥돌주형틀에 부어내는 방법을 써서 품을 적게 들이면서도 많은 쇠활촉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그외에도 창과 칼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병쟁기들도 간편하게 하면서도 든든하게 만들었으니 왜적이 쳐들어와도 능히 물리칠수 있게 하였다고 상주하였다.

그러면서 이것은 고을원이 정사를 잘한 까닭으로 이루어진 일이므로 동래현령에게 상을 내려 고무해야 할것이라고 제의하였었다.

세종은 리천을 불러들이였다.

《경은 동래현령에게 상을 내리자고 제의하였소.

경이 말한것처럼 농사와 군사일이 잘되고있는것은 가상한 일이요.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서 고맙소. 그래, 그 옥돌주형과 수차, 신묘한 병쟁기들은 누가 만들어냈소? 고을원이 직접 만들지는 않았겠지?》

세종이 빙그레 웃으며 리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사오이다. 그모두를 장영실이라는 관노가 만들었나이다. 소신이 그 관노가 옥돌주형에 쇠활촉을 주조하는것을 제 눈으로 여겨보았사온데 이는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뭐, 관노가?!》

세종이 무척 놀라와하였다.

《경은 고을원을 추천할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장영실이를 추천할걸 그랬소.》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염을 내리쓸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늘 하는 버릇이였다.

리천은 일순 고개를 들었다가 숙이였다.

무슨 말씀이신가. 관노를 추천하라시니 이게 진정의 말씀이신가.

《경은 급히 공조의 서리 하나를 동래현에 내려보내야 하겠소. 그 장영실이란 관노를 역마에 태워 데려오도록 하오. 과인이 그 관노를 만나보겠소.》

리천은 그때에야 임금이 롱을 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았다. 그는 장영실의 뛰여난 재능을 보고 크게 놀랐었지만 임금의 말을 듣고는 그보다 더 크게 놀랐다.

《어찌 관노를 접견하오리까.》

《관노도 필요하면야 만나보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오. 그 관노가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하였다는데 과인이 그를 데려다가 한번 시험해보고 만나겠소.》

이리하여 리천은 장영실을 불러올리였고 그 다음날 세종은 직접 리천을 시켜 궁중기물을 보름내에 만들어내게 하였다. 했더니 과연 세종과 왕비를 놀래우고 경탄시키는 궁중기물을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세종은 조정의 문무신하들을 거느리고 그들과 함께 장영실을 만났다.

장영실은 객사의 관비 숙이가 빨아준 베잠뱅이를 입고 하늘같은 임금앞에 엎드려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그의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비오듯하고 어깨는 세차게 오르내리였다.

체소한 몸, 노닥노닥 덧기운 베적삼, 잔등에 놓여있는 한가닥 총각의 머리태, 절을 하면서 황망히 벗어놓은 패랭이갓.

어느것을 보아도 빛나는 지혜와 총명이 나올 싹수가 보이지 않았다.

세종은 측은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문무신하들은 저으기 실망하여 낯빛을 흐리였다.

《네가 동래현 관노 장영실이냐?》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는 은은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장영실의 심혼을 흔들었다.

《예이, 황송하옵나이다. 동래현 관노 장영실이 감히 문안드리옵나이다.》

장영실은 감격하여 어깨를 떨었다.

《네가 글을 읽고 쓸줄 아느냐?》

세종은 글을 알고 모르는것을 기준삼아 사람을 헤아려보았다. 저 관노가 글을 알고 총명을 나타내였다면 앞으로도 병쟁기나 농쟁기를 위시하여 나라의 문물을 크게 떨치는 기물들을 많이 만들어낼수 있겠지만 글을 모르고 무엇이건 훌륭히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소경이 문걸쇠를 잡는 격이여서 크게 기대할수 없는것이다.

세종은 이것이 념려되였던것이다.

《3천자문은 수월하오나 그이상은 더 익혀야 하옵나이다.》

신하들은 저 천한 관노가 웬걸 글을 알랴 하고들 있다가 의외로 3천자문은 수월하다는 말을 듣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영실은 열두살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어머니가 얻어다주는 책을 가지고 천자문을 뗐다.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고 하였지만 관비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여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간 다음에는 글을 읽지 못하였다.

관노가 어찌 글을 읽으랴. 쬐꼬만 아이로 마구간의 두엄도 쳐내고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으며 온갖 심부름을 안고 해가 지도록 뛰여다녔다.

어느날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문득 어머니가 그를 깨웠다.

《얘야,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 글을 읽어야지.》

어느때나 쟁쟁히 마음속에 살아있는 어머니 목소리! 그는 벌떡 일어났다.

《알겠소이다. 어머니―》

허지만 어머니가 꿈속에 오셨다는것을 알고는 그 모습이 그리워 울었다.

그는 눈물을 씻고 광솔불을 켜고 글을 읽었다. 그밤이후 그는 아무때나 글을 읽으면 어머니가 옆에 앉아서 웃으시는것만 같았다.

어머니가 보고싶으면 아무리 피곤한 밤이라 해도 책을 잡았다.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고 글자들은 하늘의 별처럼 머리속에 반짝반짝 박혀들었다. 그에게는 글이자 어머니였고 어머니자 글이였다.

이렇게 배운 글은 어머니가 잊혀지지 않듯이 머리속에 깊이 새겨졌다. …

《음― 3천자문은 수월하다?! 그만하면 부끄럽지는 않니라. … 네가 옥돌주형을 만들고 또 여러가지 훌륭한 기물들을 만든다는 말이 빈소리가 아니였고나! 너는 그래 어떤 글을 읽었느냐?》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지만 많이 보지는 못하였사옵니다.》

《그렇겠다, 시골에 무슨 책이 많으랴. 그러나 걱정할것 없니라. 이후에 많이 읽을수 있으리라.》

세종은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았다. 자, 보아라, 내가 얼마나 귀중한 보배를 얻었는가를 너희들은 보느냐 하는 눈빛이였다.

《너는 누구의 시를 좋아하느냐?》

세종은 기술에 지혜로운 이 시골관노가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의는 어떤지 알고싶어서 이같이 물었다.

《황송하옵나이다. 천한 몸이 시를 론하기는 당치않사오나 성상께옵서 물으심에 대답을 아니 올릴수 없사옵나이다. 문충공 정몽주의 〈단심가〉이나이다.》

세종은 그 대답이 무척이나 반가와 빙그레 웃었다.

아, 이것 봐라. 이 관노가 고려의 충신처럼 살겠다는 뜻을 늘 품고있었기에 이런 대답을 할수 있었고나. 임금은 장영실이가 마음에 흠썩 들었다.

《그러면 한번 읊어보아라.》

《예이.》

장영실은 황송히 머리를 조아리고 랑랑히 시를 읊었다.
 

     이 몸이 죽어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장영실은 읊기를 마치고 눈물을 흘리였다.

자기와 같은 노비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러히도 지대한 관심을 베푸는 임금을 위하여 일백번 고쳐죽는대도 일편단심 변함없을 맹세가 눈물과 함께 용솟음쳤던것이다.

《여봐라, 리조정랑이 있느냐?》

세종이 불현듯 신하들을 돌아보며 엄숙히 물었다.

부름을 받은 리조정랑이 송구히 한발 나서면서 두손을 가슴노리에 모아잡고 읍하였다.

《소신 정랑 최숙강 여기 있사옵니다.》

《과인은 경상도 동래현 관노 장영실을 상의원별좌 종5품벼슬에 임명하노라. 장영실을 노비대장에서 지워버리고 관리대장에 올리며 품계에 맞는 옷갓을 내주고 맡은 직무를 다 할수 있도록 조처해주어라. 알았느냐?》

세종은 이렇게 엄히 뒤를 다지고 정랑의 대답을 기다리였다.

정랑이란 조정관리들의 등용과 승진, 해임과 파직에 이르기까지 그 문서처리를 맡아보는 벼슬이름이다.

정랑은 아니들을 말을 들은듯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깜짝 놀라 《이 어찌된 일이요. 그럴법이 어디 있소. 소신은 불가하오.》 라고 속생각을 나누듯이 서로 마주보며 술렁이였다.

정랑은 주위사람들도 자기의 립장과 같다는것을 알아차리고 용기를 내여 대담하게 말하였다.

《상감마마, 아뢰이기는 황송하오나 어찌 관노를 해방하오며 또 벼슬까지 껑충 뛰여넘어 줄수 있으리까. 이는 고려조에도 없었고 본조에서도 없는 일이옵니다.

바라건대 조상전래의 관례를 깨뜨리지 마시와 내리신 하교를 거두어주시기를 청하옵나이다.》

신하들은 모두었던 숨을 가만히 내쉬였다. 정랑이 다행스럽게도 옳게 제의하였던것이다.

리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동래현에 갔을 때에는 장영실을 만나보고 그 재능이 아깝다고 한스러워하였다. 임금이 그를 직접 만나겠다고 할 때에도 선뜻 응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5품벼슬까지 제수하는데야 어찌 찬성할수 있으랴.

장영실은 아슬아슬한 벼랑끝에 까마득히 올라선듯 정신이 아찔하였다. 한발자국 잘못 짚으면 천길만길 떨어져 온몸이 산산 부서져버릴것만 같아 몸을 떨었다.

《상감마마, 이 비천한 출신이 상감마마를 몸가까이 뵈옵는것만도 죽어 여한이 없사온데 어이 벼슬까지 받겠사오니까. 하늘같은 성은에 고마운 마음 바다를 이루지만 벼슬을 감당키 어렵사오니 어지를 거두시기를 비나이다.》

《너는 사양말아라. 그만한 재목감이 되기에 벼슬을 주니라.》

세종의 목소리에는 엄정스러움이 짙었다.

리조정랑과 신하들이 들으라고 음성을 가다듬었던것이다.

《상감마마―아― 간절히 비나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은것처럼 세상은 이미 높고낮음이 굳건히 정해져있사옵니다. 보잘것없는 출신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높고낮음이 뒤바뀌고 세상이 꺼꾸로 서는 시초를 열어놓는 길이옵나이다. 이것은 천륜을 어기는것이니 소인은 천벌을 면치 못할것이나이다. 거듭 청컨대 어지를 거두어주옵소서.》

문무신하들은 이 웬 소리냐, 노비의 입에서 천하의 리치를 담은 말이 청산류수처럼 흘러나오다니 하고 놀라는 꼴이였으나 다음순간엔 네가 감히 무슨 입이 있다고 함부로 혀바닥을 놀리느냐 하듯이 아니꼬운 눈초리로 장영실을 노려보았다. 만약 임금이 없다면 당장 매를 쳐서 내쫓고싶었다.

그러나 세종은 만족한듯 대견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저렇게 체소하고 가긍스러운 몸 어디에서 저런 영특하고 총명한 말이 나오느냐. 말을 시켜볼수록 뜻이 깊고 지혜로운 말을 쏟는다. 그의 잔등에 흘러내린 총각의 머리태마저 머리에 넘쳐나는 아까운 글과 지혜를 어떻게 버리랴 하여 땋아둔것처럼 느껴진다.

《네가 〈주역〉도 읽었고나. 장하도다. 벼슬을 사양하는 리유가 너의 처지와 어울려 참대처럼 올곧고 사리가 사계절처럼 드팀없이 정연하고나. 너의 말을 들어보니 너는 벼슬직분을 능히 감당해내리라.

여러 재상들은 듣거라. 과인은 장영실에게 벼슬을 하사할 결단이 더욱 굳어졌도다. 허나 령상대감의 의견은 어떠하시오?》

세종은 선왕때부터 오랜 신하로 늙어오는 령의정 황희를 존대스럽게 돌아보았다.

황희는 경건히 옷갓을 바로 잡고 임금앞에 나아가 운운하였다.

《상감께서 비천한 신분일지라도 인재를 귀히 여기시는 뜻이 이리도 높으시고 원대함에 감복됨이 그지없나이다. 어찌 모래속에 있는 금싸래기라 하여 줏지 아니 하며 노비출신인재라 하여 아니 쓰리까. 벼슬을 주고 일을 시켜보면서 쓰고 안쓰고를 가늠해보아도 늦지 않사옵나이다. 신은 성상께서 내리신 결단이 가당한줄 아나이다.》

황희는 백발을 수그리며 눈물까지 글썽이였다.

《고마운 말이요. 경이 과인의 마음을 알아주니 참말 감사하오.》

이리하여 장영실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높은 벼슬을 받고 객사로 나왔다.

세종은 장영실이 물러간 다음에 문무백관들을 둘러보며 빙긋이 웃었다.

《노비를 어찌 해방하겠느냐, 또 어찌 노비에게 벼슬까지 주겠느냐고 한 정랑의 말도 옳다. 어떻게 조상전래를 깨버리겠느냐. 그러나 과인이 천한 노비에게 벼슬을 주는것은 그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해서 나라의 문물을 선양시키고 국력을 튼튼히 하자는데 있지 결코 노비없는 세상을 만들자는것이 아니다. 노비없이야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느냐. 량반이라는 바다에 노비라는 한방울의 물이 섞여들면 바다물이 변할것 같으냐? 응, 허허…》

세종이 이렇게 웃으니 그제야 문무백관들이 깨도가 된듯 갓쓴 머리들을 끄덕이면서 곁따라 웃었다.

세종은 다시 《그리고 또 온 나라에 노비가 많은데 그들의 불만을 눅잦히는데서도 장영실과 같은 노비를 올려놓는것이 좋으면 좋았지 나쁠것은 없니라.》 하고 부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당하옵나이다. 장영실이 모래속의 모래라면 내버리고 금싸래기라면 주어들고 요긴하게 쓰면 되나이다. 소신은 상감께서 취하신 조치가 노비들과 백성들을 격앙시켜 너도나도 누구나 명철하고 현명한 임금님을 받들고 나라를 받드는데 크게 이바지하리라고 보아지나이다.》

황희는 이렇게 여쭙고 임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장영실의 소문은 한입건너, 두입건너 사람들의 경탄스러운 숨결을 타고 퍼져나갔다.

나중에는 산과 들에 부는 봄바람처럼 밭일하는 농부들의 귀에도 속살거리며 스쳐가고 키낮은 삽짝문과 소소리높은 일각대문까지도 날아넘어갔다. 고금에 없는 이 소문은 한성에 드나드는 왜인들의 객관에도 흘러들었다.

그러나 본인 당사자인 장영실은 자기에 대한 소문이 크게 번져가는것을 몰랐다. 그는 세찬 충격에 정신을 잃은것처럼 자신도 잊었고 세상만사도 다 잊었다.

오로지 자기가 서울로 올라올 때 《오빠, 오빠, 나도 함께 갈래―》 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영아만이 떠오르고 이제라도 한달음에 달려가 불쌍한 동생에게 《영아야, 울지 말아. 눈을 뜨고 이 오빠를 보아라.》 하고 높은 벼슬에 오른 제모습을 보여주고싶은 생각만이 간절하였다.

그리고 임금을 만나러 대궐로 들어갈 때 베잠뱅이를 빨아주고 기워준 객사관비 숙이가 죽을 때까지 옷을 빨아주겠다고 방그레 웃던 그 얼굴이 보여왔다. …

가라말이 《푸르릉―》 코투레질을 하였다.

말도 자기를 타고온 사람이 이 고개마루에서 너무 오래 앉아있는것이 지루한 모양인지 이발저발 옮겨짚으며 두귀를 쭝깃거렸다.

장영실은 깊은 추억에서 깨여났다.

해는 수영포 하늘중천에서 벙글거리며 그가 갈길을 비쳐주었다.

가라말이 어서 가자는듯 또 《푸르릉―》 코투레질을 하였다.

장영실은 이 가라말을 타고가라고 내놓은 만복의 부모들이 고마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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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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