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5

 

그 작식대원은 진대나무에 걸터앉아 곁에 앉은 참모장이 묻는 말에 선선히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외삼촌이 처창즈근거지에 들어가 만났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로 권영벽동무를 만났다오?》하고 참모장은 녀대원을 흘깃 돌아봤다.

《그 말은 안했습니다.》

《어째 안했을가?》

《비밀이 샐가봐 그랬겠지요. 아바이가 좀 꽁합니다. 옛날부터…》

《조카도 믿지 못한단 말이요?》

《친조카보다 먼 다리가 아닙니까? 에그, 답답해서…》하고 혀를 찼다.

《그래두 저는 살아있다는걸 알았습니다.》

《어떻게?…》

《밀영에 와서 쌀주머니를 풀어보니까 글쎄 쌀이 어찌나 좋은지 다시 망에 갈구 키로 쳐서 낸것 같습니다. 그리구 쌀속에는 노란북어 열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조직성원이 아니구야 이렇게 지성을 다할수 있습니까.》

《그렇소. 옳소. 바로 봤소! 동무 예민하구만. …》

《에그, 별소리를…》

《무산아재》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우며 웃었다.

《참모장동지, 우리 외삼촌은 겁쟁입니다.》

《…》

《삼촌어머니 말이 혜산사건이 터져 2천명이 잡혀갔다, 3천명이 잡혀갔다, 권영벽이두 끌려갔다. … 이런 소문이 상촌에까지 날아들자 그 불찌가 자기한테 튀여올가봐 두달이상이나 밤잠두 못자며 가슴앓이를 했답니다. 그래서 내 콱 욕했습니다. 아니 불찌가 여기까지 날아오자면 누가 변절해서 불어야 하는데 권영벽동지가 어떤분인데 촌바우들… 하고 야단을 쳤더니 외삼촌이 웃방에 있으면서두 찍소리 못했습니다.》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았는가. 누가 잡혀가면 관계자들이야 불안할수 있지. …》

그때였다.

리철금이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그를 빤히 여겨보며 무엇인가 말할듯 말듯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림수산은 의아해서 무슨 할 얘기가 있는가고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리철금은 그한테로 돌아앉으며 이전에, 아주 옛날에 우리 외삼촌네 집에 와서 식사한 일이 없었는가고 물었다. 참모장은 좀 당황해서 얼결에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나는 꼭 본것 같습니다! 봤습니다! 겨울인데 외삼촌네 집에 심부름을 갔다가… 외삼촌이 옹노로 메돼지를 잡은걸 룡정서 왔다는 중학생 둘하구…》

참모장은 벌떡 일어섰다.

《뭐- 요?!》

《생각납니까?!》

《그날 나와 권영벽은 메돼지고기국을 두사발씩 제꼈단 말이요. 핫하하…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나도 방금전에 그 생각을 했단 말이요! 허허…》

《무산아재》는 노여움이라도 든듯 갑자기 머리를 외로 틀고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도 몇번 물어볼가 하다가 아니면 어찌랴싶어…》

《그래도 용케 생각했구만…》

《그날 저는 촌체네라 공연히 부끄러워 웃방 문틈으로 정주칸에서 식사하는 두 중학생을 내다봤는데 어찌나 멋쟁이구 얼굴두 환한지… 에그, 그 환한 얼굴은 어디가구 그렇게 험하게 깎였습니까? 한분은 감옥에 가구…》

《무산아재》는 고개를 떨구고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참모장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설음같은것이 치밀어 목이 꺽 메였다.

《어찌겠소. … 혁명을 하는게 아니요…》

그때 뒤쪽에서 떠들썩한 말소리가 나고 락엽들이 흩날리는 수림속에서 오백룡중대장이 뛰여내려왔다. 그는 참모장이 왔다는 련락을 받고 하마툰지구에서 급히 왔던것이다.

 

×

 

참모장은 식량공작정형에 대한 오백룡의 보고를 듣고는 몹시 불만스러운 얼굴로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겨울이 박두해온걸 보지 못하는가, 식량공작이 너무 굼뜨고 소극적으로 진행되였다, 어째 지하조직을 찾아내여 인민들속으로 대담하게 들어가지 못했는가, 래일이라도 주력부대가 도착하면 어떻게 하는가… 사령관동지께서는 너무 걱정되여 나를 파견하시였다.

그리고는 금후 대책을 의논하였다.

그날 오후 림수산참모장은 한명찬과 리철금을 데리고 상촌으로 떠나갔으며 오백룡은 전령병과 함께 하마툰지구로 향하였다.

배포유하고 주눅이 좋은 오백룡은 지적을 받았지만 참모장이 왔으니 이제는 됐다는 생각에 날개돋친 걸음으로 수림속을 누벼나갔다.

그는 밤이 퍽 깊어 하마툰의 송화강건너 강냉이밭에 이르렀다.

강냉이밭속에서 일손을 다그치던 대원들이 밭머리에 나타난 오백룡중대장을 보자 우르르 밀려나왔다. 정신없이 달려나오다가 강냉이대에 발이 걸채여 엎어지는 대원도 있었다.

오백룡은 그들한테 참모장동지가 식량공작을 대대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왔으며 지금 상촌지구에 나가있다는 말만 하고 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입을 모아 사령부와 자기네 부대들의 소식을 물었다.

오백룡은 격정에 넘친 목소리로 사령부와 주력부대는 지금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적군의 포위를 뚫고나오고있다, 미구에 식량이 있는 화라즈밀영에 올것이다, 결사의 각오로 식량공작을 크게 벌리자! 라고 호소하였다. 그리고는 강냉이밭속으로 뛰여들어가려는데 7련대에서 온 박주호소대장이 앞을 막아섰다.

《참모장이 상촌으로 직접 나간게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니구…》

《허…》

《우리하고 같이 떠났네. 〈무산아재〉를 데리고 간걸 보면…》

《리철금이요?!》하고 박주호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백룡은 이 사람이 철금의 소리만 나오면 왜 이러는가 하는 의혹이 들었지만 모르는척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 외삼촌을 어째보자는것 같네.》

《쳇, 우리도 물러났는데 될가요?》

《글쎄 이전에 그 지구에서 정치공작이랑 했다니까 어떨는지 일이 잘되면 련락하겠다고 했네.》

언제 적들이 나타날지 모르는 위급한 정황에서 분초를 다투어 강냉이걷이를 다그치는 대원들의 맹렬한 움직임으로 강냉이밭은 수라장처럼 되여버렸다.

바싹 마른 강냉이잎사귀들이 와스스… 와스스… 설레는 소리와 함께 이삭들을 왁살스럽게 비틀어따는 소리, 이리저리 뛰여다니는 대원들의 발길에 짓밟혀 강냉이대들이 넘어지고 부러지는 소리, 휘파람같은 부름소리들…

《이쪽으로!… 이쪽으로!》

《여, 가마니… 가마니를 빨릿!》

대원들은 세개의 작업조, 강냉이이삭을 따는 조, 이랑들에 줄줄이 널린 이삭들을 그러모아 가마니들에 쓸어넣는 조, 그 가마니들을 둘러메고 송화강기슭으로 뛰여나가 나루배에 싣는 조로 나뉘여 일했다. 매생이가 그 가마니들을 싣고 저쪽 기슭으로 가면 거기서는 서너명의 대원들이 그것을 농민들의 달구지에 옮겨싣고 중간지대의 골짜기 음페지점까지 가게 되여있었다.

오백룡이와 박주호는 운반조에 속하여 묵직한 강냉이가마니들을 잔등에 업거나 둘러메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더운땀을 휘뿌리면서 뛰여다녔다.

이튿날 새벽녘 강냉이수확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였다.

오백룡이 끙하고 강냉이가마니를 떡돌같은 잔등에 둘러메는데 강쪽에서 소쩍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이쪽 강냉이밭속에서 건드러진 퉁소가락이 울렸다. 소쩍새소리는 어디선가 련락원이 온다는 신호였고 퉁소가락은 환영한다는 화답신호였다. 퉁소는 박주호가 부는것이였다.

오백룡은 신바람이 나서 강냉이가마니를 추슬러업고는 강뚝쪽으로 뛰여나갔다. 그가 강뚝에 올라서니 서너명의 사람들을 태운 매생이가 강물에 떠있었다.

오백룡은 물가로 뛰여내려가 가마니를 내려놓고는 환하게 웃으며 강물우로 미끄러져오는 나루배를 지켜보았다. 소쩍새신호를 듣고 달려나온 대원들이 어느덧 그의 뒤에 울바자처럼 늘어섰다.

그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고있는 매생이를 바라보며 흥성거렸다.

《저 앞쪽에 탄 농촌아낙네를 좀 보라구.》

《아- 니 저게 우리 철금동무 아니야?》

사공이 된 대원이 노를 걸싸게 젓고 농촌아낙네차림인 《무산아재》는 이물쪽에 앉아 이편 기슭만 바로보고있었다.

삐- 걱… 삐걱… 노젓는 소리, 물속에 배겼다가 건뜻 들리는 노끝에서 부서지는 달빛, 매생이가 가까이 옴에 따라 이름할수 없는 정과 기쁨을 싣고 이쪽기슭으로, 이쪽기슭으로 밀려오는 잔물결의 반짝임…

기슭에 거의 다 와서 배는 밑창이 무엇에 걸렸는지 더 나오지 못하고 한자리에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아마 서툰 사공이 물밑너럭바위같은데 배를 올려놓은것 같았다.

《사공》은 돌아가는 배우에서 헤덤비며 노대를 물속에 박고는 배를 뒤로 밀려고 안깐힘을 썼다.

《여- 배를 엎지르겠다-》

《조심- 조심-》

이쪽에서 목소리를 죽여가며 일러주고 《사공》이 급해맞아 쩔쩔매는 그 복새통에 《무산아재》는 움쭉 일어나 물속에 뛰여내리려고 서둘렀다.

《가만… 가만…》하고 오백룡이 강물에 뛰여드는데 중키에 얼굴이 너부죽한 사람이 물결을 걷어차며 앞질러 뛰여나갔다.

박주호였다. 그는 쪽배로 다가가 아무 소리없이 다짜고짜로 《무산아재》를 덥석 안아들고 돌아섰다. 녀대원은 《아이고- 망칙해!》하고 새된 소리를 지르며 내려놓으라 버둥거렸다. 그 바람에 사나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게걸음질치며 넘어질듯이 첨버덩거렸다. 그러나 녀대원을 더 꽉 그러안고 갈지자걸음으로 물속을 헤가르며 나와 기슭에 내려놓았다.

모두 유쾌하게 껄껄거리는데 리철금은 치마자락을 툭툭 털고 저고리앞섶을 여미고는 오백룡중대장앞으로 다가갔다.

《중대장동지, 참모장동지가 오늘 저녁무렵까지 상촌뒤산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식량공작이 좀 됐나?》

《좀… 좀이 아닙니다.》

《뭐?!》

《참모장동지가 몇해전 경찰에 박아넣은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을 만났습니다. 그 어른이 여태 깔고있던 지하조직을 총동원했지오다. 그래 우리 외삼촌도 식량지원에 나섰습니다.》

《히야- 참모장이 다르구나! 됐- 다.》

오백룡이 환성을 터뜨리는데 대원들은 어깨가 좀 으쓱해진 《무산아재》한테 우르르 모여들어 수고했다고, 장하다고 손을 잡아흔들며 떠들썩하게 인사하였다. 박주호도 벙글거리며 다가와서 그 녀자한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모두를 아연케 하는 뜻밖의 일이 생겼다.

《무산아재》가 박주호소대장이 앞에 나타나자 갑자기 성이 독같이 나서 그의 가슴을 활 밀어버렸던것이다.

《아니 왜 이러우?》

《몰라서 묻소?!》

《아니 허허… 아니 이 동무가?…》

《안겠으면 곱게 안을게지 사람을 뭘로 알구…》 그리고는 홱 돌아서 중대장이 사라진쪽으로 걸어갔다.

대원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박주호를 돌아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너무 꽉 안았는가, 손이 가서는 안될데로 가지 않았느냐 수군수군 물어보았다.

박주호는 무안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험한 얼굴로 그 녀자가 사라진쪽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저런것도 녀자야? 넨장…》

박주호의 고향은 먼 길주명천땅의 아간이라는 오붓한 산촌이였으나 그의 인생은 불행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그는 세살에 량친을 여의고 촌수가 먼 친척집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라났다. 열두살에 지주집에 팔려가 꼴머슴을 하다가 주인의 회중시계를 훔쳤다는 혐의를 받아 죽도록 매를 맞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울며불며 훔치지 않았노라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주인은 네놈이 그 회중시계를 한두번만 여겨봤느냐, 벌써부터 눈독을 들인다는걸 알고있었다면서 귀를 비틀었다. 여겨본것은 사실이였다.

뜨락을 쓸다가도 주인이 개화장을 짚고 퇴마루아래 뜨락에 내려서서 회중시계를 꺼내볼 때면 금빛이 령롱한 그 진귀한것이 너무도 희한하여 넋없이 바라보았던것이다. 주인은 이 도적놈을 고간에 가두고 제입으로 죄를 토설할 때까지 밥을 주지 말라고 호령했다. 주호는 너무 억울하여 눈물로 이틀밤을 지샌 다음 환기창으로 빠져나와 넓은 세상을 향해 내뛰였다. 북관땅의 도회지들을 떠돌아다니며 빌어먹기도 하고 품팔이도 하였는데 처음에는 제멋대로 돌아치는 그 자유분방한 생활에 재미가 들었으나 종당에는 지주집에서와 같은 함정에 빠진것이였다.

어느 부자집뜨락의 빨래줄에서 옷가지들이 잃어져도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으며 어느 상점창고가 털리워도 거리의 류랑아들을 무리로 잡아들여 뭇매를 안겼다. 화물렬차가 전복되여도 주재소에 끌고가서 주리를 틀며 네놈새끼들이 철길에 돌을 놓았지, 모다구를 놓았지 하며 따지고들었다. 당치 않은 루명은 얼마나 뒤집어쓰고 억울한 매는 얼마나 맞았던가, 의지가지할데가 없어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에 다리밑이나 오물장의 넝마들속이나 탈곡장의 짚덤불속에서 오돌오돌 떨다가 쪽잠이 든적은 그 얼마였던가… 그 시절 주호한테는 계절의 추위보다도 세상사람들의 랭대, 몰인정이 참고 견디기 더 여려운것이였다. 따뜻한 정이 그리워 남몰래 숨어서 소리없이 울었다.

관상을 볼줄 안다는 어느 할망구는 나는 왜 어디 가나 도적으로 몰리는가고 묻는 주호한테 이마가 두드러지고 눈길이 음험하고 얼굴에 감때사나운 구석이 있기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팔자를 면하기란 어려운것이니 두더지처럼 내내 땅속에 들어가 살면 어떨는지… 하고 가슴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크고작은 수난을 당하며 지푸라기처럼 세상의 찬바람속을 굴러다니던 주호는 어느해 《아오지탄광》의 갱마구리속에 들어가 탄을 캐게 되였을 때 문득 그 관상쟁이할망구가 떠올라 이제는 두더지처럼 되였으니 마음편히 지낼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반년도 못되여 전에 없이 엄청난 혐의가 《두더지》한테 들씌위졌다.

깊은 밤중, 정신없이 자는 그를 같은 마구리의 탄부아바이가 흔들어깨웠다. 네가 낮에 탄광사무실에 석탄을 실어갔느냐… 불이 났다, 사무실이 다 탄다, 네가 석탄속에 몰래 밀어넣은 발파용남포약이 폭발해서 불이 났다는거다. 빨리 뛰라. 내가 왜 뛰겠소. 나는 그러지 않았소, 뛰면 진짜 그런걸로 되지 않소, 이 자식아 저놈들이 점 찍으면 죄인이 되는거다 뛰라, 뛰라, 이제 경찰이 달려올거다. 세상 한끝까지 뛰라… 주호는 몸부림치며 잠시 생각하다가 내뛰였다.

한달후 연사오지까지 와서 정착했다. 깊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어 감자농사를 지어먹으며 3년을 숨어살았다.

그해 추석날 처음으로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고 인촌에 몰래 내려가 제주로 구해온 술로 목을 추기였다.

그날밤에는 여느때없이 외롭고 쓸쓸해져 종바리로 술을 들이켰다. 추석의 휘영청 밝은 달, 음산한 바람소리, 흩날리는 락엽… 자기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품, 살뜰한 정이 여느때의 몇백갑절로 그리워났다. 아, 굶주리고 헐벗어도 살지만 인정이 없으면, 누구하고나 정을 주고 받지 못하면 살수 없는것이 인생인가… 주호는 가슴을 허비다가 마구 엎어져 소리내여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지 꿈속에서처럼 행색이 초라한 웬 로인이 그의 산전막으로 들어오며 산신령이 아니라 이 세상 속인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 하고는 하루밤 묵어갈수 없느냐고 하였다.

로인은 빚값에 끌려갔다가 종적을 감춘 외동딸을 찾아 팔도강산을 다 헤매고 북간도땅으로 넘어가려는 길손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주호는 로인의 신세도 처량하여 남은 술을 권하였다.

그는 로인에게 서른이 되여오도록 장가도 못들고 이 산중에서 외토리로 은둔생활을 하게 된 자기 신세와 지난날의 수난사를 다 털어놓고는 제 설음에 겨워 끅끅 흐느껴울었다.

산신령같은 로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으며 그의 머리며 어깨, 등을 쓸어만지고 자리에 눕히였다. 그리고는 정에 굶주린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워주었다.

이튿날 아침 북간도로 떠나기에 앞서 로인은 꼴망태에서 손때묻어 반들거리는 짤막한 참대막대기 두개를 꺼내여 하나로 맞추었다. 퉁소였다.

로인은 하루밤 묵어가는 값으로 《명약》을 남기고 간다면서 그것을 주호의 손에 쥐여주었다. 가슴이 쓰릴 때마다 이걸 불게나, 그러면 이 여러 구멍들로 설음과 울분이 다 빠져나가 속이 후련해지고 가슴속 어혈도 풀린다네, 건드러진 가락으로 넘어가면 몸이 홀가분해져 어깨춤도 덩실덩실 나오고 인생이 한결 즐거워질거네…

그리고는 퉁소부는 법을 배워주고 먼길을 떠났다.

그해 겨울 국내정치공작을 마치고 돌아가던 오중흡의 소조가 비통하게 울부짖는 퉁소소리를 듣고 그의 산전막에 찾아들어왔다.

주호는 그들에게 자기 얼굴생김새때문에 늘 끔찍한 혐의를 쓰게 되여 이 산중으로 들어오게 되였다고 하였다.

그들은 껄껄 웃으며 이런 미남을 그렇게 험하게 본단 말인가, 동무 얼굴생김새때문이 아니라 왜놈들 세상, 식민지세상탓에 그런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주호는 혁명군에 참군하여 오중흡의 대원이 되였다.

그는 행군의 쉴참이나 숙영지의 우등불가에서 퉁소를 불었다. 구성진 그 소리에 대원들은 피곤이 가셔지고 흥이 나서 박수를 치며 노래까지 불렀다. 어느날 밤에는 푸접이라고는 전혀 없는 작식대원 리철금, 노래나 춤의 포재도 없어보이던 그 목석같은 녀대원이 우등불가의 춤판으로 부나비처럼 날아들어 남들처럼 팔을 놀리고 발을 구르고 어깨를 들썩거렸다.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 회오리치는 화기… 불그림자가 얼른거리는 녀대원의 벌건 얼굴, 눈과 입술에 넘치는 웃음… 건드러진 퉁소가락에 흐느적이는듯한 머리칼, 펄럭이는 군복치마…

주호는 넋을 뿜어대듯 기운껏 퉁소를 불고 또 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빨찌산의 드바쁜 생활속에서도 그 녀대원은 주호의 눈앞에 전에 없이 자주 나타났다.

그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이였다.

리철금은 대원들속에서 이름보다도 《무산아재》라는 별호로 더 잘 통하였다. 고향은 무산이 아니고 단천인가 어딘가라는데 녀성답게 아기자기하게 구는 일이란 거의 없이 성미가 드세고 시원시원하고 구수한데도 있어 바람세차지만 인심은 후한 고장이름이 붙은것 같았다.

리철금은 광부의 딸이였다. 결혼 첫날밤에 신랑을 잃었다. 로동쟁의에 참가하여 왜놈 광구장을 때려엎은것이 드러나 칼을 찬 순사놈들이 달려들어 생때같은 사람을 잡아갔던것이다. 그 사람은 함흥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형틀에서 숨이 졌다. 잡혀 간지 한달후였다.

리철금은 양재물을 마시려다가 어머니한테 들켜 뺨을 후려치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 일이 있은뒤 가족을 끌고 살길을 찾아 만주로 들어왔다. 그리고 훈춘인가 화룡인가 어느 목재판에서 처서군살이를 했다. 철금이는 함바집에서 그릇닦는 일을 하고… 산천이 연두빛으로 물들어가는 어느 화창한 봄날, 리철금이 시내물가에 옹크리고앉아 빨래를 하는데 까마귀옷을 입은 산림경찰 한놈이 다가와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에서 빨찌산의 총소리만 울려도 쥐구멍을 찾던 놈이 제법 꽃한송이를 꺾어들고 허세를 부리며 등뒤에서 오락가락하며 감언리설을 늘어놓다가 철금의 머리에 꽃송이를 꽂아주었다. 너무도 메스꺼워 응대도 안하니 무엇이 동한줄로 여겼던지 뒤로 와락 달려들어 젖가슴에 손을 밀어넣었다. 철금은 그놈을 물속에 멨다꽂고 목을 눌러죽였다. 그리고는 놈의 총을 빼앗아들고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는 어느 새벽 유격대로 찾아왔다.

박주호가 그 녀대원에 대하여 아는것이란 이것이 전부였다.

강냉이밭속에서는 대원들이 분주히 뛰여다니고있었다.

밭이랑들에서 강냉이이삭들을 그러모으는가 하면 그것들을 가마니들에 쓸어넣고 강기슭의 나루배로 메여나르는것이였다.

박주호는 리철금의 일로 얼굴이 좀 화끈거렸지만 그쯤한 일로 주눅이 들 위인이 아니였다. 그는 강냉이밭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그러다가 화김에 맞다들린 강냉이가마니를 번쩍 들어올려 끙 하고 뚝심을 쓰며 떡판같은 잔등에 둘러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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