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5(2016)년 7월 25일
 

이름있는 유학자 정몽주

 

고려시기의 이름있는 유학자이며 리성계의 고려왕조전복행위를 반대한 봉건관료인 정몽주는 량반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24살(1360년)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1362년에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오른 후 례조정랑, 성균관 박사, 사성, 대사성을 거쳐 수문하시중이라는 최고관직에까지 올랐다.

고려말 안팎의 정세가 복잡하던 시기에 봉건관료로 활동한 정몽주는 어지러워진 봉건통치체계를 바로잡아보려고 모대기기도 하였다. 고려봉건왕권의 절대적인 옹호자인 그는 신돈의 《개혁》과 그 좌절, 대토지소유자들인 림, 렴일파의 전횡과 그 제거 등 고려정계의 복잡한 소용돌이속에서 언제나 대토지소유자들의 전횡을 막고 고려왕권을 유지강화하는 자세에서 문제를 처리하였다.

정몽주는 운봉전투(1380년)를 비롯한 왜구를 무찌르는 싸움에도 직접 참가하였고 왜구를 단속할데 대한 교섭의 임무를 맡고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온적도 있었다.

정몽주는 정치무대에서 활동한 고위급봉건관료였을뿐아니라 고려시기 손꼽히는 유학자였다. 그는 고려말기에 들어온 성리학(유교의 한 학파)을 깊이 연구한 학자이다. 그가 성균관 박사로 있을 때 당시 유학자로 이름높던 리색과 함께 강의를 하였는데 언제나 리색보다 앞섰으므로 많은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정몽주는 1388년 리성계에 의한 《위화도회군》으로부터 시작된 고려왕조전복행위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료동원정의 단행때 원정군은 5만명으로 편성되였는데 총지휘는 최영이 맡고 좌군도통사로는 조민수, 우군도통사로는 리성계가 임명되였다. 원정군이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고려왕조를 뒤집어엎을 정치적야심을 가지고있던 리성계는 반란을 일으켜 군대를 되돌려세웠다. 이것을 력사에서 《위화도회군》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료동원정은 중도에서 좌절되고 고구려, 발해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리성계는 위화도에서 돌아오자마자 국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9살난 그의 아들을 왕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료동원정을 주장했던 최영 등 대신들도 학살하였다. 성리학을 통치리념으로 내세웠던 리성계는 당시 수문하시중자리에 있던 최고위급관료였고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몽주의 지지를 받는것이 새 왕조성립에 유리하였으므로 그만은 죽이지 않고 리용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정몽주는 리성계의 정권탈취음모를 지지하지 않았다. 한번은 리성계의 아들 방원이 자기 집에 정몽주를 초청해놓고 술을 권하며 이렇게 시조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정몽주는 이에 대답하여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 있으랴》라고 하면서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다하겠다는 자기 립장을 다시금 밝혔다. 물론 이것은 봉건유교사상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이렇게 되자 리성계일파는 그를 1392년 4월에 개성 선죽교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 개성의 선죽교 -

 

본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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