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6(2017)년 3월 17일

 

고구려는 고조선의 계승국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진 우리 민족은 고대시기에 동방의 첫 나라 고조선을 세우고 세나라시기에는 고구려를 일떠세워 동방조선을 빛내였다.

우리 민족국가의 정통성은 고조선에서 그 터전이 마련되고 고구려에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우선 고조선의 령토와 중심지, 그곳 주민들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에서 뚜렷이 찾아볼수 있다.

6세기초경까지 고구려는 단군조선시기의 옛 령토와 그 후손들을 거의 다 망라한 나라로 등장함으로써 고조선의 계승국으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하였다.

이와 함께 고구려는 3천년간의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자기의 수도로 삼음으로써 고조선의 중심지를 이어받았다. 고구려는 3세기중엽인 247년(동천왕 21년)에 벌써 지금의 평양을 선인왕검 즉 단군이 살던 곳이라고 하면서 나라의 림시수도, 별도로 정하였고 그후 427년에 국내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완전히 옮기였다.

고구려가 오랜 준비밑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마지막까지 유지한것은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의 중심지, 수도의 지위를 고수하고 빛내이자는데 주되는 목적이 있었다.

고구려와 고조선과의 계승관계는 정치, 경제, 문화분야에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왕밑에 대보(후에 국상, 막리지)를 두고 중앙관료들을 총괄하게 한 고구려의 중앙통치체계는 왕 다음에 호가를 두고 국가의 모든 사업을 맡아보게 한 고조선, 단군조선의 통치체계를 이어받은것이였다. 그리고 두 나라가 다 농업을 위주로 하는 나라였다는 사실, 고조선의 돌무덤을 계승하여 고구려가 돌각담무덤, 돌칸흙무덤을 발전시켰다는 사실들도 계승성의 일면을 보여준다. 특히 살림집구조에서 온돌을 놓은것을 비롯하여 의식주 등 많은 령역에서 볼수 있는 고구려시기의 풍속들은 고구려가 력사적으로 고조선의 풍습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령토와 주민, 수도를 이어받고 선행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와 풍습을 이어받아 발전시킴으로써 그 계승국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빛내여나갈수 있었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고구려가 고대시기 고조선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지위와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빛내여나간 사실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고조선의 고대시기 노예소유자사회의 수립과 고대국가들의 성립과 발전,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역할을 놀았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는 고조선의 이러한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지위와 역할을 이어받아 우리 나라에서의 노예제붕괴와 봉건국가확립에서 선도적역할을 놀았고 민족의 통일적발전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중심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놀았다.

고구려는 남쪽의 노예소유자국가 진국의 붕괴와 이 일대에서의 봉건관계의 설립과 발전, 그리고 백제, 신라, 가야 등 봉건국가들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치였다.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통일적발전과 세나라의 통일을 위한 투쟁을 주동적으로 벌려나갔다.

세나라의 통일은 당시 우리 민족의 지향이였고 우리 나라 력사발전의 합법칙적요구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오래전부터 세나라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을 주동적으로 벌려나갔다.

세나라의 통일과정이 촉진되고 세나라사이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고구려의 발전된 제도와 성과들이 백제와 신라에 전파되였다.

실례로 고구려산성에서 대표적형식인 고로봉식산성은 그 방어력이 강한것으로 하여 백제나 신라에 점차 널리 보급되여갔으며 고구려의 정릉사와 금강사의 1탑 3금당식 가람배치형식은 백제기술자들의 지도밑에 건설된 신라의 황룡사(경주)의 가람배치에 영향을 주게 하였다.

고구려는 세나라시기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결정적역할을 하였다. 고구려는 근 1 000년간 존재하면서 외래침략세력의 끊임없는 대규모적인 침입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튼튼히 지켜냈다.

제반 사실은 고구려가 고대시기 고조선의 선도적이며 중심적인 지위와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당시와 후세사람들의 인식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것은 고구려시기와 이후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였다.

고구려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고조선의 계승국이라고 자부하고있었다. 첫 통일국가인 고려시기 사람들속에서도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는 견해가 자리잡고있었다.

고려시기에 편찬된 《삼국유사》의 왕력에는 동명왕을 단군의 아들(또는 후손)로 전하고있는데 이것 역시 고구려를 고조선의 계승국으로 생각하고있던 고려시기 사람들의 력사적인식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인식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력사기록에서도 력력히 찾아볼수 있다. 1450년경 리석형 등이 편찬한 《동국통감》, 18세기 중반기에 안정복이 완성한 《동사강목》 등 통사류책들과 18세기말 19세기초 우하영이 편찬한 《천일록》, 20세기초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 등의 제도사관계책들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앞선 고조선, 부여, 구려, 진국의 력사와 결부시키고 고려, 조선봉건왕조시대의 력사와 련결시켜 하나의 일관한 통사체계로 서술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속에 고구려가 고조선의 계승국이였다고 보는 인식이 확고히 자리잡고있었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고구려사람들이나 주변의 외국인들, 후세사람들이 고구려를 고조선의 계승국으로 인식하고있었다는것을 뚜렷이 실증해주고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우리 민족이 세운 고조선의 당당한 계승국이였다.

박사 김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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